[천자 칼럼] 아라온 호
쇄빙선의 역사는 11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러시아 사람들이 북극 인근 해역에 살기 시작하면서 유빙으로 가득찬 바다 항해에 필요해서 코크(Koch)라는 이름의 특수한 배를 만들기 시작했다. 수면 접촉 부위에 널빤지를 덧대 얼음 충돌시 배의 파손을 최소화하고 물 아래 잠기는 부분은 계란형으로 만들어 얼음에 갇히지 않도록 하는 게 특징이었다고 한다.

적극적으로 얼음을 깨는 현대식 쇄빙선의 효시는 1864년 러시아가 만든 ‘파일럿’이다. 유럽 최초이자 선체를 강철로 만든 최초의 쇄빙선이기도 했다. 얼음 위로 쉽게 올라가도록 뱃머리가 20도가량 들리도록 설계한 점은 이후 대부분 쇄빙선의 모델이 됐다.

쇄빙의 원리는 뱃머리를 얼음 위에 얹어 선체의 무게로 얼음을 짓눌러 깨는 것이다. 쇄빙선의 3대 특징으로는 단단한 선체, 강한 추진력, 쇄빙에 최적화된 디자인이 꼽힌다. 파도를 가르기 쉽도록 뾰족하게 생긴 보통의 뱃머리와 달리 쇄빙선의 선수가 둥그스름한 것도 얼음에 쉽게 올라타기 위해서다. 하지만 이런 특성 때문에 쇄빙선의 승선감은 최악이라고 한다. 얼음을 깰 때 진동 소음은 물론 일반 항해시에도 배의 구조상 좌우로 흔들림이 심한데다 둥근 선수가 파도를 가르지 못하고 출렁이는 탓에 승무원들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라는 얘기다. 쇄빙선은 만드는 데는 물론 운영하는 데도 막대한 경비가 든다. 국내 최초 쇄빙선 아라온호 제작에 1000억원이 넘는 돈이 들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덕분에 이제는 하루 8000만원이나 하는 임대료를 외국에 주지 않아도 된다. 제2 남극기지 설립에 탄력이 붙게 된 것은 물론이다.

즐거운 뉴스보다 우울한 일이 많았던 2011년, 세밑에 모처럼 흐뭇한 소식이 전해졌다. 남극에서 유빙과 충돌해 보름간 옴짝달싹 못하던 러시아 어선 스파르타호를 아라온호가 극적으로 구조한 것이다. 7일간 무려 3700㎞를 전속력으로 달려 성탄절인 25일 현지에 도착, 사흘간 철야작업을 벌여 32명의 선원 전원과 배를 안전하게 구조하는 데 성공했다. 아라온은 ‘온 바다’라는 순우리말 뜻에 걸맞게 드넓은 남극바다를 누비며 산타클로스와 같은 선행을 베푼 셈이다. 쇄빙선은 영어로 ‘icebreaker’다. 국적과 인종을 넘어 얼음을 깨고 인명을 구한 아라온호처럼 새해는 사람과 사람 간 장벽을 깨고 긴장도 해소하는 ‘ice breaking’의 해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김선태 논설위원 k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