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가 법원의 재판진행 상황을 제대로 확인하지도 않은 채 헌법소원심판 청구사건을 잘못 각하해버린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특히 이 청구사건은 변리사의 소송대리권 인정여부 문제와 관련된 민감한 내용을 담고 있어 헌재가 성급히 변호사 편을 들어주려다 발생한 ‘의도된 실수’가 아니냐는 의혹도 일고 있다.

헌법재판소는 한모씨가 ‘특허 사건에서 변리사를 소송대리인에 포함시키지 않은 것은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침해한다’며 변리사법 조항 등에 대해 제기한 헌법소원심판 청구사건에서 재판관 전원 일치 의견으로 ‘각하’ 결정했다고 지난 1일 밝혔다. 각하는 청구된 사건이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할 자격요건조차 갖추지 못했을 때 내리는 결정이다.

하지만 특허법원과 사건 당사자들에게 확인해본 결과 헌재 측의 오판임이 드러났다.

사건의 개요는 이렇다. 청구인 한씨가 백남준미술관을 상표등록한 것은 2001년 2월이다. 그런데 경기문화재단이 2008년 백남준 아트센터를 건립하면서 ‘한씨가 백남준 씨의 동의 없이 무단으로 상표를 등록했다’며 특허심판원에 상표등록 무효심판을 청구했다. 특허심판원은 이를 유효하다고 결정내렸지만 특허법원과 대법원은 심결취소소송에서 경기문화재단 측 손을 들어주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한씨 측이 상표권 침해금지 및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해 1심에 이어 항소심에서 소송이 진행 중이었다. 항소심에서 한씨는 자신이 대리인으로 내세운 변리사의 소송대리권이 인정되지 않자 헌법소원심판을 제기한 것이다.

헌법재판소의 황당한 결정은 여기서 시작된다. 헌재는 앞서 대법원의 판결(유효심결 취소소송)로 등록상표는 이미 무효가 확정된 것으로 착각했다. 상표가 무효됐다면 한씨 측이 유효를 전제로 제기한 별도의 손해배상소송에서 파생된 헌법소원심판은 더 이상 심리할 실익이 없다고 판단해 각하 결정을 내린 것이다. 헌재 결정문에 “청구인의 등록상표는… 등록무효사유가 있다는 내용의 판결이 확정되었으므로…”라는 문구가 들어간 이유다.

그러나 대법원의 판결로 상표무효소송이 종결된 것이 아니었다. 특허법원 관계자는 2일 기자와 통화에서 “특허소송이 아직 진행 중인데 헌재가 명백하게 오판했다”고 말했다. 그는 “대법원의 확정판결이 있더라도 상표가 자동적으로 무효가 되는 게 아닌데 헌재가 특허법의 법리를 잘 몰랐던 것 같다”고 지적했다. 실제 한씨 측은 대법원 판결과 그에 이은 특허심판원의 무효심결에 불복해 특허법원에 무효심결취소소송을 제기해 놓은 상태다. 한씨는 변론기일로 정해진 오는 12일 특허법원에 출석해 백남준 씨의 동의 여부를 놓고 경기문화재단 측과 공방을 벌이기로 예정돼 있다.

한씨의 대리인인 고영회 변리사는 “상표를 유효 또는 무효 처리하는 과정은 일반 사건과 다르다”며 “헌재가 상표등록원부만 떼봤다면 상표가 무효로 됐는지 금방 확인할 수 있는데 사실관계도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말도 안 되는 결정을 내렸다”고 말했다. 헌재의 결정은 일사부재리의 원칙에 따라 더 이상 불복절차가 없다.

이에 대해 헌재 측은 “대법원의 판결로 등록무효 소송이 확정됐으며, 이를 기초로 내린 결정”이라며 오류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김병일 기자 kb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