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美, 오래된 정책적 차이로 '보수' 구분
日자민당, 총선패배 뒤 등장…濠자유당 '보수' 표현 없어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회가 정강ㆍ정책에서 `보수'라는 표현을 삭제하는 문제로 논란을 벌이다 더는 삭제 논의를 않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다.

이런 논란은 국내에서 `보수'의 의미가 `수구'로 받아들여지고 마치 개혁을 거부하는 것처럼 인식된다는 문제 제기에서 시작됐다.

하지만 정당 정치의 뿌리가 깊은 외국에서는 보수가 변화와 전통적 가치를 함께 아우르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미국 = 민주당과 공화당이 공존하는 양대 정당체제가 가장 오래된 미국은 양 당이 표방하는 주요 현안에 대한 정강정책에 따라 민주당이 보다 리버럴하고, 공화당이 보다 보수적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지지 기반도 차이가 있다.

리버럴한 민주당은 전통적으로 노동조합 세력과 흑인, 히스패닉 등 종교적ㆍ인종적 소수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고, 보수적인 공화당은 재계나 금융계 등 상공인들과 농업계층을 주요 기반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보수적이다' `리버럴하다'는 정당 평가는 구체적 정책에 따른 지향점을 바탕으로 미국내 정치적 스펙트럼에 따라 분류되는 것이며, 각 정당이 스스로 강령 속에 "보수를 지향한다" "리버럴을 지향한다"라고 적시하지는 않고 있다.

1830년대 초반과 1854년에 각각 창당된 민주당과 공화당은 지금까지 당 강령에 그런 표현을 담은 경우는 없었다.

당의 정강은 대개 대통령선거가 열리는 해의 전국 전당대회에서 손질이 되며 대통령후보가 표방하는 정강정책 공약의 형태로 채택된다.

당 정강은 그 시대가 안은 미국내 문제점과 지향점을 '전문'(preamble)을 통해 개괄적으로 제시한 뒤 국가를 이끌어갈 경우 정치, 경제, 사회, 외교 등 각 분야의 정책방향을 구체적으로 담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지난 2008년 존 매케인 상원의원을 대통령후보로 선출하면서 채택한 공화당 강령에도 보수라는 표현은 없다.

물론 공화당은 정치, 사회, 경제, 외교적 현안에 대한 정책을 바탕으로 사회적 보수주의(social conservative), 재정보수주의(fiscal censervative), 네오콘(neo-conservative) 등으로 불린다.

이는 선언적으로 "우리는 보수다"라고 표방하는 것에서가 아니라 오랜 세월 구체적 현안에 대해 취해온 정책과 언행을 통해 대중에 각인된 이데올로기적 인식이다.

2008년 공화당 강령은 오히려 "보주수의자, 온건주의자, 리버테리언, 무당파, 심지어 리버럴주의자까지도 포함한 모든 미국 국민들에게 얘기하는 단일정당"이라고 적시하고 있다.

역시 버락 오바마 상원의원을 대통령후보로 선출하며 민주당이 2008년 8월 채택한 강령 전문 어디에도 스스로 진보주의라고 표방하는 문구는 없다.

대신 민주당도 자신들의 강령에 대해 "역사상 가장 개방된 정강"이라며 "희망을 향한 공화당, 무당파는 물론 새로운 방향을 갈망하는 모든 미국인들을 위해 다가가고 있다"고 여러 정파와 계층을 포용하려는 의지를 천명하고 있다.

그러나 민주당이든 공화당이든 정강에 담긴 구체적 정책에서는 모호함이 없이 뚜렷한 차별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감세 등 조세정책, 기업활동 지원, 금융규제, 에너지 환경정책, 국가안보정책, 정부의 역할이나 개입 범위, 복지국가로서의 역할 등에 대해서도 확연히 구분이 되는 입장을 정강에서 나타내고 있다.

구체적 정책 차이를 통해서 보수와 진보의 선이 그어진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는 150년이 넘는 역사적 과정을 거치며 형성된 양 정당의 정체성이다.

◇영국 = 현 집권당의 이름 자체가 보수당(The Conservative Party)이다.

보수당의 전신은 17세기 후반 국교단일화를 주장하면서 국왕 편에 섰던 귀족, 목사, 지주 등을 중심으로 형성된 토리당이다.

1832년 의회 개혁법으로 인한 참정권 확대에 따라 근대적 의미의 `보수당'으로 발전했다.

전문직 종사자 등 중산층을 주요 지지기반으로 하고 있고 지역별로는 중남부 잉글랜드에 강한 뿌리를 두고 있다.

청교도 혁명을 통해 약해진 왕권을 틈타 귀족들이 상원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출발했지만 영국의 보수당은 산업혁명으로 팽창한 부르주아 계급과 노동계급을 포용할 수밖에 없었다.

국왕과 영국 성공회 등을 지키기 위해 사회적 흐름인 선거권 확대 등 사회 변화를 흡수해 전통적 가치를 지키면서 변화를 지향하는 당의 정체성을 만들어 나간 셈이다.

`대처리즘'이라는 단어를 사전에 남긴 보수당 출신인 마거릿 대처 전 총리는 경제적으로는 국가의 개입을 최소화하는 가운데 통화 안정을 통해 인플레이션을 안정시키고 재정지출을 줄여 작은 정부를 표방했다.

그는 특히 엄격한 규율과 도덕성, 가족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빅토리아 시대의 가치관 회복을 내세우는 사회적 보수주의를 강조했다.

대처의 양아들로 불리며 지난 2010년 집권한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가 붕괴된 가정의 회복을 내세우는 것도 이러한 사회적 보수주의와 같은 맥락이다.

불과 39세의 나이로 2005년 말 당수에 오른 캐머런은 새로운 토리(New Tories) 정책을 발표한 뒤 총리에 오른뒤에도 이에 기반한 정책을 추진 중이다.

정치 사회적으로는 복지 혜택에 기대는 수혜자들에 대한 심사를 강화해 재취업을 유도하고 사회 복지 분야에서 자선단체 등의 역할을 강조하고 유럽통합(EU)에 회의적이고 이민자 규제를 강화하는 등이 주요 내용이다.

외교 및 국방 분야에서는 도덕적 정당성을 내세우고 강요된 민주주의를 거부하는 등 자유주의적 보수주의 성향이 뚜렷하다.

보수당이 총선 승리 뒤 발표한 선언문(정강)이나 자유민주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하면서 공개한 `연립정부 합의문'에는 분야별 정책을 자세히 설명할 뿐 당명을 제외한 정책적 의미에서 `보수'라는 표현은 없다.

지난해 10월 4일 열린 보수당 전당대회에서 던컨 스미스 노동 연금 장관은 연설을 통해 "보수당은 이제 가난한 사람들의 정당"이라면서 "노동당보다도 불평등 문제에 대처할 최선의 정책을 갖고 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최근 개봉된 대처 전 총리의 일대기를 담은 `철의 여인'이라는 영화는 유로존 위기와 영국 정부의 초긴축 정책 등과 맞물려 최근 영국 사회에 일고 있는 `강한 보수당'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고 있다.

◇일본 = 정강의 '보수'라는 표현에 관한 한 일본의 대표적인 보수 정당인 자유민주당(자민당)은 한국의 한나라당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변해왔다.

자민당은 1955년 보수 정당인 자유당과 일본민주당의 '보수 합동'에 의해 탄생했다.

사회당 좌우파가 통합한 데 위기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주로 보수적인 정책을 펼쳤지만, 구성원 면면은 좌우파를 망라했고, 강령에도 '보수'라는 단어는 사용하지 않았다.

1955년 11월15일자 자민당 강령은 '민주주의의 이념을 기반으로 문화적 민주국가의 완성을 추구한다'고 적었고, 동시에 발표한 '창당선언'은 스스로의 정치 이념을 '첫째로 의회민주정치, 둘째로 개인의 자유와 인격의 존엄'이라고 규정한 뒤 '진보적인 정책을 실행하겠다'고 선언했다.

당시만 해도 '보수'라는 말은 없고, '진보'라는 단어만 있었던 셈이다.

자민당은 이후 보수 색채를 분명히 하는 쪽으로 변해갔다.

창당 50주년을 맞아 2005년 11월에 만든 신(新)강령은 '새로운 헌법 제정을 요구하고, 일본인으로 태어난 자부심을 갖는 일본인을 육성한다'거나 '작은 정부, 지속가능한 사회보장제도를 추구한다'고 명시, 신보수주의 색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2005년에 만든 '창당 50년 선언'에서도 "우리나라의 역사와 전통과 문화를 존중하고, 도덕의 고양을 추구한다"고 적었다.

자민당이 강령에 '보수'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것은 2010년 1월24일자 강령에서였다.

2009년 8월 총선에서 민주당에 대패하고, 정권을 내준 뒤 당을 재정립하는 과정에서 강령을 새로 만들었다.

자민당은 세번째이자 마지막 강령에서 "우리 당은 '반(反)공산·사회주의, 반(反)독재·통제정치'와 '일본다운 일본의 확립'이라는 두 가지 목적 하에 '정치는 국민의 것'이라는 원점에서 창당했다"며 "베를린 장벽 붕괴와 소련의 해체는 우리 당의 승리였다"고 선언했다.

또 "우리 당은 늘 진보를 추구하는 보수 정당이다"라며 "2009년의 (총선) 패배를 반성하며 질서 안에서 진보를 추구하고, 국제적 책무를 수행하는 일본다운 일본의 보수주의를 정치이념으로 삼아 재출발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일본 정치 전문가들은 "자민당은 창당시 미국식 근대 자유주의를 표방했고, 좌우를 망라하는 '호송선단 방식'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했지만, 2000년대 중반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내각을 거치면서 친미 보수, 신보수주의가 주류를 이뤘고, 신자유주의 경제를 추구하게 됐다"고 지적했다.

자민당 간사장실 관계자도 연합뉴스와 전화통화에서 "1955년 창당 시에는 보수라는 단어를 굳이 사용할 필요도 없었지만 냉전 체제가 사라진 뒤 당의 정체성을 두고 고민이 있었다"며 "총선 패배 후에 당의 정체성을 확실히 하는 차원에서 ‘보수’라는 단어를 강령에 처음으로 넣었다"고 설명했다.

◇호주 = 호주는 집권 노동당과 야당인 야당연합(자유당 및 국민당) 2개 정당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노동당은 노조 간부출신 위주로 구성돼 있고 자유당은 보수성향을 띤 인물들이 이끌어가고 있다.

자유당이 그나마 노동당보다 상대적으로 보수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자유당의 정강정책에는 보수(conservative)라는 표현은 없다.

자유당내에도 진보세력과 보수세력이 있지만 이는 정책방향을 두고 견해 차이를 보이는 것일 뿐 특별히 보수라고 언급하기 어렵다.

토니 애버트 자유당 대표도 보수주의자로 통하지만 낙태, 배아줄기세포 연구, 동성 결혼 등 사안에 따라 보수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을 뿐이다.

노조 간부 출신이 주도하고 있는 노동당 역시 당내 진보 및 보수세력이 있으나 보수라는 표현은 공식적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노조가 가장 세다는 빅토리아주 출신 줄리아 길라드 총리는 빅토리아주 노동당이 '반미(反美)' 성향을 갖고 있음에도 집권이후 친미(親美) 노선을 걷고 있다.

차기 총리감으로 지목되고 있는 빌 쇼튼 장관도 노조 위원장 출신이지만 보수성향을 띠고 있다.

자유당의 정강정책을 보면 주로 국민의 인권신장과 표현의 자유를 추구하면서 권력분립을 주로 강조하고 있다.

자유주의(Liberalism)를 채택하면서 개인과 기업을 앞세우고 있다.

주호주 한국대사관은 "자유당 정강정책에 보수라는 표현은 없는 것으로 안다"며 "자유당과 노동당에서 보수라는 개념은 없다"고 말했다.

(워싱턴ㆍ런던ㆍ도쿄ㆍ시드니연합뉴스) 이경욱 이성한 성기홍 이충원 특파원 ofcourse@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