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패션기업 베라왕그룹 베라 왕 CEO…샤론 스톤 · 김남주도 입었죠
모두 잠든 새벽 1시 뉴욕 맨해튼의 한 아파트. 60대의 한 여성이 침대 머리맡에 앉아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린다. 사방은 고요하다. 종이와 연필의 마찰음만 울려퍼질 뿐. 늦은 시간까지 그림에 몰입한 주인공은 세계적인 패션기업 베라왕그룹의 베라 왕 최고경영자(CEO·63)다.

그에게 오후 11시부터 오전 2시까지는 ‘창조의 시간’이다. 창의적 생각이 샘솟기 때문이다. 침실은 ‘성소(聖所)’다. 낮에는 밀려드는 손님들과 직원들을 상대해야 한다. 조용히 앉아 디자인을 구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창조의 시간’은 그를 성공한 패션 디자이너이자 사업가로 만들었다. 베라 왕은 “밤이야말로 한꺼번에 7명의 사람들이 내게 달려오지 않는 유일한 시간”이라며 “창조의 시간은 나의 성공 비결”이라고 강조했다.

“Less is more(단순한 것이 가장 아름답다).” 단순한 디자인을 강조한 혁신가 스티브 잡스의 철학을 연상시키는 이 말은 그의 좌우명이다. 정보기술(IT) 업계에서 잡스처럼 베라 왕도 웨딩드레스 업계에 새로운 물결을 만들어냈다.

◆“Less is more”

1989년 결혼식을 앞두고 베라 왕은 기분이 언짢았다. 마음에 드는 웨딩드레스를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웨딩숍에서 추천하는 웨딩드레스는 거기서 거기였다. 요란한 장식이 주렁주렁 달린 낡고 오래된 디자인이 대부분이었다. 베라 왕은 직접 디자인하기로 마음 먹었다. ‘베라왕’ 브랜드의 첫 번째 웨딩드레스가 탄생한 것이다.

결혼식 후 그는 자신처럼 결혼식을 앞두고 고민하는 신부들을 위해 웨딩드레스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이듬해인 1990년 뉴욕 맨해튼 카일호텔에 자신의 이름을 내건 첫 번째 웨딩숍을 열었다. 웨딩드레스 시장이 틈새시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베라 왕은 우선 레이스와 구슬 등 장식을 과감하게 버렸다. 대신 고급스러운 소재를 택해 우아함과 자연스러움을 강조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웨딩드레스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제품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작은 부티크로 시작한 베라왕웨딩숍은 4년 만에 어엿한 브랜드로 자리잡았다.

웨딩드레스의 성공을 발판으로 그는 2000년 기성복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향수 액세서리 신발 등으로 사업 영역을 넓혀나갔다. 성공에 성공을 거듭했다. 웨딩숍 문을 연 지 20년이 채 안 돼 베라왕그룹은 글로벌 패션기업으로 성장했다.

현재 베라 왕은 뉴욕 맨해튼의 고급 백화점인 바니스뉴욕 버그도프굿맨 노드스트롬 등에 입점해 있다. 일본 홍콩 등에도 진출했다. 국내에서는 롯데백화점 에비뉴엘과 신라호텔 등에 입점했다.

베라 왕은 브랜드 구축을 위해 스타 마케팅을 적극 활용했다. 그의 웨딩드레스는 1999년 영국 대중음악그룹 스파이스걸스의 전 멤버 빅토리아가 축구선수 데이비드 베컴과의 결혼식 때 입으면서 유명세를 탔다. 이후 제니퍼 로페즈, 샤론 스톤, 머라이어 캐리 등 해외 유명 스타들이 자신의 결혼식 웨딩드레스로 베라왕을 선택해 이름값이 더욱 올라갔다. 국내에서는 심은하 김남주 등이 베라왕 웨딩드레스를 입었다.

◆“패션의 일부가 되고 싶었다”

“바닥 청소도 좋고 봉투에 침 바르는 일이라도 좋았다. 그저 패션의 일부가 되고 싶었다.” 베라 왕의 말이다.

그가 패션에 열정을 갖게 된 것은 어머니 영향이 컸다. 중국계 미국인으로 유엔에서 통역가로 활동했던 그의 어머니는 최신 유행에 민감했다. 베라 왕은 멋쟁이 어머니를 따라 뉴욕과 파리의 미술관, 박물관, 패션쇼 등을 다니며 일찍부터 패션 세계를 접했다. 미국 사립대학인 사라로렌스대 재학 시절에는 잠시 프랑스 파리에 머물기도 했다. 패션의 본고장인 파리 생활은 그의 패션에 대한 열망을 더욱 키워놨다. 미국으로 돌아와 여름방학 때는 맨해튼의 이브생로랑 매장에서 점원으로 일했다. 그때 미국 패션지 보그의 편집자 프랜시스 패티키 스타인을 만났다. 스타인은 베라 왕과의 짧은 대화에서 뛰어난 패션 감각을 발견했다. 이 만남이 그를 패션의 세계로 이끌었다. 졸업 후 스타인에게 연락했고, 보그에 입사했다. 패션의 일부가 되고 싶었던 꿈을 이룬 것이다.

보그 출근 첫날. 베라 왕은 이브생로랑 옷을 입고 검은색과 붉은색으로 손톱을 물들인 뒤 회사로 향했다. 당시 파리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스타일이었다. 편집 간부들이 그에게 “지저분한 일을 하게 될 테니 집에 가서 갈아입고 오라”고 말했다. 그는 청바지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1년 뒤 베라 왕은 보그 역대 최연소 에디터(편집장)가 됐다. 당시 그의 나이는 23세였다. 스타인이 그의 천재성과 열정을 높이 산 것이다.

베라 왕은 보그에서 16년간 일했다. 수많은 패션계 인사들과 만나면서 패션 철학을 만들어갔다. 빠르게 변하는 패션 세계를 가까이서 지켜보며 패션을 보는 ‘눈’을 갖게 된 것이 가장 큰 성과였다. 베라 왕은 “보그에서 (패션에 대한) 안목을 날카롭게 다듬었다”고 말했다. 안목에 대해 그는 “낡은 것을 새롭게 관찰하는 방법이다. 패션이라는 개념에 어떻게 새로움을 부여하느냐, 어떻게 새로운 것을 시도하느냐가 관건”이라고 설명했다. 와이셔츠는 어디까지나 와이셔츠지만 끊임없이 새로운 창조성을 부여하는 것이 패션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일상에 예술적 감각을 불어넣는 셈이다. 베라 왕이 혁신을 통해 사업을 성공으로 이끈 비결이기도 하다.

◆휴대폰 없는 CEO…“대화하자”

1949년 뉴욕 태생인 베라 왕의 어린 시절 꿈은 세계적인 피겨스케이팅 선수였다. 그러나 그 꿈은 1968년 열린 세계피겨스케이팅대회 결승에서 부상을 당하면서 좌절됐다. 당시 나이는 19세. 더 이상 선수 생활을 지속할 수 없게 됐다.

10대에 피겨스케이팅 선수, 20대에 보그 최연소 에디터를 지내며 성공가도를 달리던 그는 잠시 랄프로렌 디자인 감독을 하다 40세에 웨딩드레스 사업가로 변신했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도전한 것이다. 2005년 그는 ‘패션업계의 오스카상’으로 불리는 미국패션디자이너협회(CFDA)로부터 ‘올해의 여성복 디자이너’ 상을 받았다. 패션계에 몸담은 지 30년 만이었다.

베라 왕은 휴대폰이 없는 CEO로도 유명하다. 대신 사무실 문을 활짝 열어놔 고객들이나 직원들이 언제나 그를 만날 수 있도록 한다. 얼굴을 보고 대화하자는 것이다. 그는 “직원들과 많은 것을 함께 나누려고 애쓴다”며 “대화를 나누다 보면 직장생활의 어려움, 가족을 부양하는 책임감 등을 느낀다”고 말했다. 이들의 고충을 해결할 대책을 마련해 회사의 정책에 반영한다는 것이다.

폭주하는 전화를 피하는 것은 창의적인 사고에 집중하기 위한 방법이기도 하다. 엄청난 양의 전화를 받다 보면 다른 일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는 “전화를 일일이 받다 보면 디자이너로서 창의력을 발휘하는 일에 방해를 받게 된다”며 “선택과 집중을 통해 사업가와 디자이너 사이의 균형을 찾기 위한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전설리 기자 slj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