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넬 "움직이기 편해야 명품"…질질 끌리던 치맛단 '싹뚝'
1917년 어느 날. 프랑스 패션계에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다. 한 여성 의류업체가 무릎 길이의 치마를 선보였기 때문이다. 당시 치마는 바닥에 끌리는 게 일반적이었다. 여성들은 바닥 먼지가 묻지 않도록 치마를 들고 다녀야 했다. 무릎까지밖에 오지 않는 치마는 파격 중 파격이었다. 뿐만 아니라 롱 재킷도 함께 선보였다. 재킷 안에 셔츠 하나만 걸치면 됐다. 코르셋으로 온 몸을 조일 이유가 사라진 것이다.

이 의상을 만든 디자이너이자 회사의 창업자는 “편하지 않다면 럭셔리한 것이 아니다”고 주장했다. 표면적인 아름다움만을 추구하던 당시 스타일을 완전히 부정한 셈이다. 이 업체는 세계적인 명품업체 샤넬이다. 샤넬은 새로운 미적 기준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루이비통, 구찌와 함께 세계 3대 명품업체로 발돋움했다.

◆명품과 미(美)의 기준을 새롭게 쓰다

샤넬은 ‘실용성’을 진정한 명품의 조건으로 삼는다. 창업자 가브리엘 샤넬은 1910년 회사 설립 이후 줄곧 이 원칙을 지켜왔다. 샤넬은 1926년 또 다른 모험을 감행했다. 남성 속옷에만 주로 쓰이던 저지 원단을 여성 드레스에 사용한 것이다. 저지는 부드럽고 신축성이 좋아 움직이기에 편했다. 여성용 승마 바지도 만들었다. 당시 여성들은 승마용 스커트를 입고 두 다리를 모은 채 말에 올라야만 했다. 가방도 달라졌다. 1955년 여성용 가방에 처음으로 어깨끈을 달았다. 한쪽 팔로 가방을 들거나 안아야만 했던 불편함을 없앴다.

샤넬의 노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샤넬은 오직 ‘움직이기 편한 차림’을 만들기 위해 신체의 모든 관절과 근육의 움직임에 대한 연구를 꾸준히 진행하고 있다. 이 때문에 샤넬 옷은 장시간 입고 있어도 어깨가 결리지 않고, 팔을 들어도 옷감이 당기지 않는다. 팔을 내리면 본래의 깔끔한 형태로 돌아온다.

샤넬의 또 다른 특징은 ‘단순함’이다. 샤넬의 디자인은 다른 업체들에 비해 심플하다. 색상도 주로 검정, 흰색, 베이지색으로 이뤄져 있다. 검은 옷을 여성들이 즐겨 입게 된 것도 샤넬의 힘이다. 샤넬은 1926년 검은 드레스를 선보였다. 상복 이외의 용도로는 거의 잘 입지 않던 블랙 의상을 여성 드레스로 만든 것이다. 세련된 느낌을 살리기 위해 검은 색을 선택했다. 검은 옷은 여성들이 가장 즐겨입는 색상 중 하나가 됐다.

샤넬의 대표 향수 ‘샤넬 No.5’의 디자인도 이런 단순함의 철학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 제품이 들어 있는 향수병은 밋밋하고 투박한 사각형 디자인이다. 여행용 남성 화장품에서 힌트를 얻어 제작됐다. 정교하고 복잡한 무늬가 들어가 있던 기존 향수병과 달리 깔끔한 이미지로 많은 인기를 얻었다.

샤넬 "움직이기 편해야 명품"…질질 끌리던 치맛단 '싹뚝'
◆전통과 혁신, 두 마리 토끼를 잡다

2002년부터 샤넬은 프랑스 전통 공방 5개를 매수했다. 공방은 상품 제작을 마무리하는 역할을 한다. 이곳에서 일하는 장인들은 샤넬이 예전부터 늘 제품에 사용하던 로고와 상징 등을 새겨 넣는다. 가브리엘 샤넬이 좋아했던 카멜리아(동백꽃) 장식과 깃털 세공만을 하는 공방도 있다. 구두만 만드는 곳도 있고, 자수만 놓는 공방도 두고 있다.

이는 단순하지만 전통을 중시하는 샤넬의 문화를 보여준다. 그래서 샤넬은 최신 트렌드에 맞춰 신제품을 남발하는 일도 자제하고 있다. ‘샤넬다움’을 표현할 수 있는 제품만을 내놓겠다는 것이다. 전 세계 명품업체들이 연간 400종의 향수를 출시하고 있지만, 샤넬은 그렇지 않다. 2008년 선보인 ‘샤넬 No.5 오 프리미에르’는 개발부터 출시까지 몇 년이 걸렸다. 2010년 나온 블루 드 샤넬은 11년 만에 출시된 남자 향수다.

전통을 중시하면서 미세한 변화를 통해 새로운 트렌드를 반영하는 것이 샤넬의 특징이다. ‘샤넬 No.5’는 1921년 출시된 이후 제조 방법과 향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하지만 용기는 조금씩 변해왔다. 본체와 뚜껑 가장자리를 에메랄드 컷으로 장식한 적도 있었다. 뚜껑의 두께를 미세하게 조정하기도 했다.

전통과 혁신을 동시에 추구하는 것이 샤넬의 철학이다. 그 덕에 ‘샤넬 No.5’ 향수는 지금도 전 세계에서 30초에 한 병씩 팔리고 있다. 1955년에 나온 ‘2.55백’은 지금도 생산량이 부족할 정도로 인기다.

◆‘고객기반을 넓혀라’

샤넬은 최고 명품 브랜드 중 하나다. 명품 브랜드의 생명은 고객이 갖고 있는 브랜드 로열티다. 샤넬은 고객들의 브랜드 로열티를 강화하기 위해 2002년 CRM(고객관계관리·고객 관련 자료를 분석하고 통합하는 소프트웨어)을 도입했다. 명품업체 중 처음이다. 이를 토대로 고객들의 취향을 파악하고 만족도를 높이는 데 활용하고 있다.

샤넬은 이와 동시에 고객기반 확대를 위한 마케팅에도 나서고 있다. ‘명품 브랜드는 일반인을 잘 상대하지 않는다’는 인식을 없애기 위한 노력이다.

2007년엔 ‘코코 마드모아젤’ 캠페인을 통해 온라인 광고에도 본격적으로 나섰다. 명품업체들이 온라인 광고에 소극적인 것과는 대조적이다. 이 캠페인은 창업자 가브리엘 샤넬의 삶을 전용 사이트를 통해 알리는 것이다. 사이트에 가면 그가 살던 곳을 입체적으로 볼 수 있다. 그가 쓰던 거울 사진을 클릭하면 ‘거울에서 향수병 뚜껑 디자인의 힌트를 얻었다’는 설명이 나오는 방식이다.

샤넬은 또 적극적으로 고객과의 소통 창구를 마련하고 있다. 메일을 통해 주 2~3회 매거진을 발송하고 아이폰 애플리케이션도 만들어 젊은 고객층과의 접촉을 늘리고 있다.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