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의 혁신 마인드 끌어들여 국제적인 '미술놀이터' 만들게요"
미국 뉴욕 맨해튼 남부 첼시의 허드슨 강변에는 실험예술 공연 공간 ‘키친(Kitchen)’이 있다. 아방가르드 문화의 산실로 불리는 이곳은 현실과 세상을 변화 시키는 전위예술의 진원지로 꼽힌다. 순수미술은 물론 언더그라운드 음악, 무용, 독립영화 등 각 분야의 실험적이고 진취적인 예술가들이 숱하게 거쳐간 곳이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 역시 이곳에서 작품을 발표하며 뉴욕 미술계에 새바람을 일으켰다.

1980년 어느 날 뉴욕 총영사관 한국문화원 문정관이던 30대 천호선 씨(전 별옥션 대표)의 부인 김홍희 씨는 현대무용가 머스 커닝햄의 후원회장인 바바라 툴을 따라 이곳에 들렀다. 마침 백남준이 레코드판과 바이올린을 때려 부수는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었다. 퍼포먼스가 끝난 후 김씨는 레코드판과 바이올린 조각을 일일이 주워 모아 사인을 부탁했고, 백남준은 조각마다 사인을 해주며 “이것을 골동품 보석함에 넣어두라”고 웃으며 말했다.

여성으로는 처음 서울시립미술관의 지휘봉을 잡은 김홍희 관장(64)은 그날 백남준을 만나고부터 아방가르드 예술에 푹 빠졌다. 1979년 남편을 따라 뉴욕에 갔던 김 관장은 이후 본격적으로 미술사를 공부했다. 이화여대 불문학과를 졸업한 지 10년이 되던 그해 맨해튼의 헌터칼리지에 입학했다. 이후 덴마크 코펜하겐대에서 미술사학을 전공했고, 캐나다 몬트리올 콘코디어대에서 미술사학과 석사 과정을, 다시 홍익대에서 서양미술사 박사 과정을 마쳤다.

“제가 서울시립미술관장으로 선임된 것은 해외에서 축적한 경험을 바탕으로 백남준 선생과의 인연, 광주비엔날레를 국제화하는 데 기여한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김 관장은 백남준과 인연이 많다. 1995년 광주비엔날레의 ‘인포아트(InfoART)’는 백남준을 도와 우리나라에서 처음 선보인 미디어아트 기획전이다. 관람객이 스크린 앞에 있는 화분을 만지면 스크린의 잎사귀가 자라는 등 인터랙티브 멀티미디어 아트는 화단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이 전시회를 계기로 그는 2000년 광주비엔날레 커미셔너, 2003년 베니스비엔날레 커미셔너를 거쳐 2006년 광주비엔날레 총감독을 맡았다. 그가 백남준 전문가, 미디어 전문가로 불리는 이유다.

그는 마음이 바쁘다. 서울시립미술관을 세계적인 뮤지엄으로 육성한다는 꿈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이엔드(최첨단 현대미술)와 소통이라는 두 바퀴로 운영할 겁니다. 교육 및 홍보를 통해 시민들이 미술을 사랑하게 만들고 싶고요. 서울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가운데 관객의 눈높이에 맞추면서도 전시의 질적 수준과 국제경쟁력을 확보하는 것이 핵심 과제예요.”

그는 “미술관 예산(120억원)과 인원(62명)은 국제도시로서 서울의 위상에 걸맞지 않지만 기존 조직을 잘 추스르면 세계적 미술관으로 거듭날 수 있다”고 말했다. 올해 잡힌 전시도 첨단 현대미술과 융합시켜 재구성할 계획이라고 했다. “인상파나 유명 근대화가 위주의 위탁기획전으로는 성공하기 힘듭니다. 올해 잡힌 블록버스터급 전시라고 할지라도 직접 기획에 참여해 새로운 각도로 다시 선보일까 해요. 12월 개최되는 에곤 실레와 클림트 특별전도 비엔나학파의 미술사적 의미를 재조명하는 쪽으로 생각하고 있고요.”

무조건 하이엔드로 가는 게 아니라 시민들이 보다 쉽게 시각예술을 접할 수 있는 ‘미술놀이터’로 만들겠다는 얘기다. 서울시립미술관이 서울의 상징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힘쓰겠다는 구상이기도 하다.

“600년 서울 역사와 현대미술을 접목시키는 게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존 전시 관행에서 벗어나 백남준의 혁신정신을 끌어들여 ‘포스트 뮤지엄’을 지향할 겁니다. 신자유주의 이후의 미술관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게 우선적으로 할 일인 거죠. 저의 아방가르드적인 생각은 시정 방향과 많이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는 큐레이터 출신 관장답게 한국 미술의 글로벌화를 위해서는 큐레이터 인프라 구축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이달 말 자신을 포함, 국내외 큐레이터 11명의 체험과 전시 노하우를 담은《큐레이터 본색》(한길아트)도 출간 예정이다. “국내 작가는 스타가 많은데, 미술관에는 스타 큐레이터가 없는 것 같아요. 국제적으로 경쟁력 있는 큐레이터를 영입할 생각도 하고 있습니다.”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