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 매니지먼트] '할아버지의 유교적 가르침' 도전 원동력…59년 역사 한국지멘스 첫 현지인 CEO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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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탐구 - 김종갑 한국지멘스 회장
문중 묘자리 외우던 어린시절
아버지 얼굴 한본 못 본 유복자…'훈장 선생님' 조부 밑에서 성장
'좁은 문' 택한 공직생활
'사무관 무덤' 대미통상 담당…6년간 워싱턴 출장만 60번
동기중 과장 승진 가장 늦었지만 국장자리는 가장 먼저 올라
문중 묘자리 외우던 어린시절
아버지 얼굴 한본 못 본 유복자…'훈장 선생님' 조부 밑에서 성장
'좁은 문' 택한 공직생활
'사무관 무덤' 대미통상 담당…6년간 워싱턴 출장만 60번
동기중 과장 승진 가장 늦었지만 국장자리는 가장 먼저 올라
김종갑 한국지멘스 회장은 관료 출신으로는 남다른 커리어 패스를 지닌 사람 중 하나다. 경제부처 차관까지 지낸 고위공직자가 퇴임 후 곧바로 민간 기업 최고경영자(CEO)로 뛰어든 사례를 찾기는 쉽지 않다. 적어도 그가 몸 담았던 지식경제부(상공부 시절부터)에서 만큼은 최초다. 하이닉스반도체 회생의 밑거름을 마련한 그는 지난해 6월 독일계 기업인 한국지멘스 회장으로 옮겼다. 여기에서도 ‘최초’의 타이틀이 붙는다. 지멘스 한국 지사의 59년 역사상 한국인 CEO 역시 그가 처음이다.
◆할아버지에게 배운 유복자
변신을 거듭해온 김 회장의 삶은 시작부터 골곡이 있었다. 그는 6·25전쟁 와중인 1951년 경북 안동에서 독립유공자 43명을 배출한 조선 최고의 지사(志士)가문인 의성 김씨 내앞문중의 후손으로 났다. 명문가 후예였지만 출생에는 가슴 아픈 사연이 있다. 6·25전쟁 때 전사한 선친과 얼굴 한번 마주하지 못한 유복자였다. 5남매의 막내로 태어났으나, 형·누이 세 명 역시 전쟁통에 병으로 잃었다. 자연히 ‘키워준 아버지’ 역할은 할아버지였다. 퇴계학의 적통을 이은 학봉 김성일의 피가 흐르는 훈장 선생님 할아버지로부터 유교적 가치관을 물려 받았다. 공직생활 내내 그가 좌우명으로 삼은 “남으로부터 받은 권한과 재물이 어려운 줄 알아라”는 말씀 역시 할아버지의 정신적 유산이다.
김 회장은 본인이 원해서 스스로 가입한 단체가 두 곳 있다. 퇴계학진흥협의회의 평생회원이고, 최근에는 선비수련문화원의 이사도 맡았다. 인성교육 전도사로 나선 이용태 전 삼보컴퓨터 회장을 비롯 김병일 국학진흥원장(전 기획예산처 장관), 심우영 전 국학진흥원장, 고병우 전 건설부 장관, 금진호 전 상공부 장관 등이 회원이다. 김 회장은 이들 모임에서도 할아버지가 느껴진다고 했다.
◆유교적 가르침 받은 유년시절
안동은 소년 김종갑의 몸과 정신의 고향이었지만, 벗어나고픈 울타리이기도 했다. 그는 “어린 시절 수많은 문중 어른들의 함자와 묘자리 위치까지 줄줄 외워야 하는 생활에서 탈출하는 게 첫 번째 꿈”이었다고 했다.
안동중을 졸업한 뒤 은행원을 생각하며 대구상고로 진학했다가, 대학(성균관대 행정학과)으로 길을 바꾼다. 중학교 시절 늘 전교 상위권을 유지했던 그는 성적이 못한 동기들이 서울대에 진학하는 걸 보고 만회해야겠다는 생각에 고시 준비에 나선다. 6개월 만에 1차에 붙고 이듬해 방위병으로 위병 생활을 하면서 하루는 밤샘 근무, 다음날 쉴 때 공부한 끝에 그해 최종 합격했다. 이여성 전 현대로템 부회장이 안동중 ‘절친’이고, 정태언 전 중부지방국세청장은 대구상고와 고시 17회 모두 동기다.
그렇다고 대학시절을 ‘범생이’ 고시생으로만 보낸 건 아니다. 사진 동호회 활동을 하면서 콘테스트에서 두 차례나 상을 탔다. 특히 영화 ‘별들의 고향’의 주연 여배우 안인숙 씨를 인물 모델로 한 사진 대회에서 동상을 받은 것은 뿌듯한 추억이다. 사진 작가 배병우 씨의 소나무 사진들을 좋아한다.
◆APEC 정상회담의 숨은 공로자
공직생활 중 김 회장은 ‘좁은문’을 택했다. 그는 상공부 시절 대미 통상 부서에서만 사무관 3년8개월, 과장 2년6개월 등 6년 이상을 내리 근무했다. 이곳은 고참이 많아 승진에서 불이익을 받는 탓에 ‘사무관의 무덤’으로 불리는 기피 부서였다. 동기 중 과장 승진이 가장 늦은 것도 그런 연유에서다.
김 회장은 그때 인생의 큰 진리 하나를 깨달았다고 했다. “투자해서 금방 안 돌아온다고 조급하지 말라. 나중에 이자 쳐서 돌아오고, 당대에 안 돌아오면 자식 때라도 돌아온다.” 결국 그는 동기 중 가장 먼저 국장 자리에 올랐다. 대미 통상 업무를 하면서 워싱턴 출장만 60번 갔다올 정도가 됐으니, 영어 실력도 부처 내에서 최고 수준이 됐다. 당시 김 회장이 낀 상공부의 대미 통상 라인은 대미 통상협상의 ‘원조 드림팀’으로 꼽혔다. 김철수 차관보는 후에 세계무역기구(WTO) 사무차장,황두연 국장은 통상교섭본부장이 됐다.
김 회장은 공직 기간 중 미국에서 석사 학위 2개를 따고 박사과정을 수료한 뒤 모교 성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을 정도로 학구파다. 어렸을 때부터 다독을 통해 속독 능력이 붙은 그는 출장 왕복길에서만 2권을 독파할 정도다. 1989년 미국 허드슨 연구소 파견 때는 하루 139마일을 다니며 인근 인디애나대에서 경제학 석사를 따기도 했다. 그 당시 김 회장이 자랑스러워하는 일이 하나 있다.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의 미래’를 주제로 한 연구 결과물에서 APEC의 활성화를 위해 APEC 서밋(정상회담)을 제안했고, 결국 그의 제안이 받아들여져 APEC 회의가 장관급 회의에서 정상 회의로 격상됐다. 그 과정에도 대미 통상 업무를 통해 친분을 쌓은 샌디 크리스토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아시아담당국장과의 네트워킹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하이닉스 회생 발판 마련
산업자원부 재직 시절 1000여개 기업을 방문하는 과정에서 기업 경영에 눈을 뜨게 됐다. 그때마다 느끼는 것이 ‘현장에 대한 갈증’이었다. 이제까지 후방에서 기업들을 지원했다면, 실제로 전투가 벌어지는 야전에서 한번 부딪쳐 보고 싶은 ‘투지’가 내면에서 꿈틀거렸다. 차관 퇴임 후 매력적인 공기업 사장 자리를 제의받았지만, 13 대 1의 사장직 공모에 뛰어들 때는 대부분이 만류했다. 그는 지금도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 중 하나를 ‘하이닉스행’으로 꼽고, 그때 격려해 준 한 후배를 ‘인생의 은인’으로 생각한다.
사장 취임 직후 사상 최악의 반도체 불황을 맞게 되지만, 중앙부처의 행정 경험이 위기를 극복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김 회장은 하이닉스 사장 초기에 자신이 기록한 청탁 메모만 70건이 넘는다고 했다. 그 중 한 건도 밑으로 내려 보내지 않고, 실제로 청탁이 한 건도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을 자랑스레 여긴다. 본인 표현으로 ‘마음 약한’ 사람이 3년간 200명 이상을 징계하고, 106명이던 임원을 65명으로 줄인 것은 지금 생각해도 가슴 저린 일이다.
윤리경영을 실천하기 위해 존경할 만한 기업인들을 찾아다니며 조언을 구했고, 그 과정에서 강덕수 STX 회장 등에게서 투명한 경비 처리에 대한 지혜를 얻었다. 하이닉스가 지난해 아시아지배구조협회에서 한국 1위 기업으로 선정된 데는 김 회장의 이 같은 노력이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다.
◆우유 한 잔값도 결제받는 CEO
김 회장은 지난해 6월 한국지멘스 회장으로 취임했다. 그의 이름 끝자대로 지경부 공무원이 ‘갑(甲)’이라면 하이닉스 사장은 을(乙), 외국계 기업 지사장인 지금은 ‘병(丙)’의 신세가 됐는지도 모른다.
회장 취임 한 달 뒤 그는 감사실로부터 두 가지 지적을 받았다. 운동을 마치고 오전 7시40분께 출근하는 그는 하이닉스 시절부터 회사에서 시리얼, 우유, 사과로 아침을 먹는 것이 습관화돼 있다. 지멘스 내 다른 부서에서도 일찍 출근하는 사람에게는 도너츠와 커피를 무료 제공하는 까닭에 비서실에서 이를 구입했다. 또 하나는 취임 다음날 급하게 문상을 가면서 비서가 산 3만5000원짜리 검은색 넥타이다. 감사실에서 이 두 케이스 모두 사적인 일로, 개인 비용으로 처리해야 한다는 지적이었다. 김 회장은 이 얘기를 듣고 감사실의 독일인 직원을 오래 둬야겠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고 했다.
김 회장은 예순이 지난 나이에 외국계 기업 CEO로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다. 그는 이 자리가 지식경제부 장·차관의 일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했다. 지멘스가 진출한 세계 190여개국 지사 중에서 어떻게 하면 일감을 많이 따올까 궁리하는 것처럼, 지경부 고위 관료들의 주요 임무 중 하나도 투자 유치다. 물론 그의 새 목표는 한국지멘스를 1위 지사로 만드는 일이다. 이제 또 한번의 변신을 맞고 있는 그의 각오는 김우중 전 대우회장이 쓴 책 제목과 같다. “세계는 넓고, 할일은 많다.”
윤성민/이유정 기자 smyoon@hankyung.com
■ 김종갑 한국지멘스 회장
▶출생-1951년 경북 안동 ▶가족-부인과 2남 ▶학력-대구상고, 성균관대 행정학과, 미 뉴욕대 경영학 석사, 미 인디애나대 경제학 석사, 성균관대 행정학 박사 ▶경력-17회 행정고시 합격(1975년), 통상산업부 통상협력국장(1997년) ,특허청장(2004년), 산자부 제1차관(2006년), 하이닉스 사장(2007년), 한국지멘스 회장(2011년)
◆할아버지에게 배운 유복자
변신을 거듭해온 김 회장의 삶은 시작부터 골곡이 있었다. 그는 6·25전쟁 와중인 1951년 경북 안동에서 독립유공자 43명을 배출한 조선 최고의 지사(志士)가문인 의성 김씨 내앞문중의 후손으로 났다. 명문가 후예였지만 출생에는 가슴 아픈 사연이 있다. 6·25전쟁 때 전사한 선친과 얼굴 한번 마주하지 못한 유복자였다. 5남매의 막내로 태어났으나, 형·누이 세 명 역시 전쟁통에 병으로 잃었다. 자연히 ‘키워준 아버지’ 역할은 할아버지였다. 퇴계학의 적통을 이은 학봉 김성일의 피가 흐르는 훈장 선생님 할아버지로부터 유교적 가치관을 물려 받았다. 공직생활 내내 그가 좌우명으로 삼은 “남으로부터 받은 권한과 재물이 어려운 줄 알아라”는 말씀 역시 할아버지의 정신적 유산이다.
김 회장은 본인이 원해서 스스로 가입한 단체가 두 곳 있다. 퇴계학진흥협의회의 평생회원이고, 최근에는 선비수련문화원의 이사도 맡았다. 인성교육 전도사로 나선 이용태 전 삼보컴퓨터 회장을 비롯 김병일 국학진흥원장(전 기획예산처 장관), 심우영 전 국학진흥원장, 고병우 전 건설부 장관, 금진호 전 상공부 장관 등이 회원이다. 김 회장은 이들 모임에서도 할아버지가 느껴진다고 했다.
◆유교적 가르침 받은 유년시절
안동은 소년 김종갑의 몸과 정신의 고향이었지만, 벗어나고픈 울타리이기도 했다. 그는 “어린 시절 수많은 문중 어른들의 함자와 묘자리 위치까지 줄줄 외워야 하는 생활에서 탈출하는 게 첫 번째 꿈”이었다고 했다.
안동중을 졸업한 뒤 은행원을 생각하며 대구상고로 진학했다가, 대학(성균관대 행정학과)으로 길을 바꾼다. 중학교 시절 늘 전교 상위권을 유지했던 그는 성적이 못한 동기들이 서울대에 진학하는 걸 보고 만회해야겠다는 생각에 고시 준비에 나선다. 6개월 만에 1차에 붙고 이듬해 방위병으로 위병 생활을 하면서 하루는 밤샘 근무, 다음날 쉴 때 공부한 끝에 그해 최종 합격했다. 이여성 전 현대로템 부회장이 안동중 ‘절친’이고, 정태언 전 중부지방국세청장은 대구상고와 고시 17회 모두 동기다.
그렇다고 대학시절을 ‘범생이’ 고시생으로만 보낸 건 아니다. 사진 동호회 활동을 하면서 콘테스트에서 두 차례나 상을 탔다. 특히 영화 ‘별들의 고향’의 주연 여배우 안인숙 씨를 인물 모델로 한 사진 대회에서 동상을 받은 것은 뿌듯한 추억이다. 사진 작가 배병우 씨의 소나무 사진들을 좋아한다.
◆APEC 정상회담의 숨은 공로자
공직생활 중 김 회장은 ‘좁은문’을 택했다. 그는 상공부 시절 대미 통상 부서에서만 사무관 3년8개월, 과장 2년6개월 등 6년 이상을 내리 근무했다. 이곳은 고참이 많아 승진에서 불이익을 받는 탓에 ‘사무관의 무덤’으로 불리는 기피 부서였다. 동기 중 과장 승진이 가장 늦은 것도 그런 연유에서다.
김 회장은 그때 인생의 큰 진리 하나를 깨달았다고 했다. “투자해서 금방 안 돌아온다고 조급하지 말라. 나중에 이자 쳐서 돌아오고, 당대에 안 돌아오면 자식 때라도 돌아온다.” 결국 그는 동기 중 가장 먼저 국장 자리에 올랐다. 대미 통상 업무를 하면서 워싱턴 출장만 60번 갔다올 정도가 됐으니, 영어 실력도 부처 내에서 최고 수준이 됐다. 당시 김 회장이 낀 상공부의 대미 통상 라인은 대미 통상협상의 ‘원조 드림팀’으로 꼽혔다. 김철수 차관보는 후에 세계무역기구(WTO) 사무차장,황두연 국장은 통상교섭본부장이 됐다.
김 회장은 공직 기간 중 미국에서 석사 학위 2개를 따고 박사과정을 수료한 뒤 모교 성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을 정도로 학구파다. 어렸을 때부터 다독을 통해 속독 능력이 붙은 그는 출장 왕복길에서만 2권을 독파할 정도다. 1989년 미국 허드슨 연구소 파견 때는 하루 139마일을 다니며 인근 인디애나대에서 경제학 석사를 따기도 했다. 그 당시 김 회장이 자랑스러워하는 일이 하나 있다.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의 미래’를 주제로 한 연구 결과물에서 APEC의 활성화를 위해 APEC 서밋(정상회담)을 제안했고, 결국 그의 제안이 받아들여져 APEC 회의가 장관급 회의에서 정상 회의로 격상됐다. 그 과정에도 대미 통상 업무를 통해 친분을 쌓은 샌디 크리스토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아시아담당국장과의 네트워킹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하이닉스 회생 발판 마련
산업자원부 재직 시절 1000여개 기업을 방문하는 과정에서 기업 경영에 눈을 뜨게 됐다. 그때마다 느끼는 것이 ‘현장에 대한 갈증’이었다. 이제까지 후방에서 기업들을 지원했다면, 실제로 전투가 벌어지는 야전에서 한번 부딪쳐 보고 싶은 ‘투지’가 내면에서 꿈틀거렸다. 차관 퇴임 후 매력적인 공기업 사장 자리를 제의받았지만, 13 대 1의 사장직 공모에 뛰어들 때는 대부분이 만류했다. 그는 지금도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 중 하나를 ‘하이닉스행’으로 꼽고, 그때 격려해 준 한 후배를 ‘인생의 은인’으로 생각한다.
사장 취임 직후 사상 최악의 반도체 불황을 맞게 되지만, 중앙부처의 행정 경험이 위기를 극복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김 회장은 하이닉스 사장 초기에 자신이 기록한 청탁 메모만 70건이 넘는다고 했다. 그 중 한 건도 밑으로 내려 보내지 않고, 실제로 청탁이 한 건도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을 자랑스레 여긴다. 본인 표현으로 ‘마음 약한’ 사람이 3년간 200명 이상을 징계하고, 106명이던 임원을 65명으로 줄인 것은 지금 생각해도 가슴 저린 일이다.
윤리경영을 실천하기 위해 존경할 만한 기업인들을 찾아다니며 조언을 구했고, 그 과정에서 강덕수 STX 회장 등에게서 투명한 경비 처리에 대한 지혜를 얻었다. 하이닉스가 지난해 아시아지배구조협회에서 한국 1위 기업으로 선정된 데는 김 회장의 이 같은 노력이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다.
◆우유 한 잔값도 결제받는 CEO
김 회장은 지난해 6월 한국지멘스 회장으로 취임했다. 그의 이름 끝자대로 지경부 공무원이 ‘갑(甲)’이라면 하이닉스 사장은 을(乙), 외국계 기업 지사장인 지금은 ‘병(丙)’의 신세가 됐는지도 모른다.
회장 취임 한 달 뒤 그는 감사실로부터 두 가지 지적을 받았다. 운동을 마치고 오전 7시40분께 출근하는 그는 하이닉스 시절부터 회사에서 시리얼, 우유, 사과로 아침을 먹는 것이 습관화돼 있다. 지멘스 내 다른 부서에서도 일찍 출근하는 사람에게는 도너츠와 커피를 무료 제공하는 까닭에 비서실에서 이를 구입했다. 또 하나는 취임 다음날 급하게 문상을 가면서 비서가 산 3만5000원짜리 검은색 넥타이다. 감사실에서 이 두 케이스 모두 사적인 일로, 개인 비용으로 처리해야 한다는 지적이었다. 김 회장은 이 얘기를 듣고 감사실의 독일인 직원을 오래 둬야겠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고 했다.
김 회장은 예순이 지난 나이에 외국계 기업 CEO로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다. 그는 이 자리가 지식경제부 장·차관의 일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했다. 지멘스가 진출한 세계 190여개국 지사 중에서 어떻게 하면 일감을 많이 따올까 궁리하는 것처럼, 지경부 고위 관료들의 주요 임무 중 하나도 투자 유치다. 물론 그의 새 목표는 한국지멘스를 1위 지사로 만드는 일이다. 이제 또 한번의 변신을 맞고 있는 그의 각오는 김우중 전 대우회장이 쓴 책 제목과 같다. “세계는 넓고, 할일은 많다.”
윤성민/이유정 기자 smyoon@hankyung.com
■ 김종갑 한국지멘스 회장
▶출생-1951년 경북 안동 ▶가족-부인과 2남 ▶학력-대구상고, 성균관대 행정학과, 미 뉴욕대 경영학 석사, 미 인디애나대 경제학 석사, 성균관대 행정학 박사 ▶경력-17회 행정고시 합격(1975년), 통상산업부 통상협력국장(1997년) ,특허청장(2004년), 산자부 제1차관(2006년), 하이닉스 사장(2007년), 한국지멘스 회장(201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