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위기 3년…월스트리트가 달라진다] '헤지'가 사라진 헤지펀드…'절대 수익률' 신화는 끝났다
자산 287억달러의 세계적 헤지펀드 오크-지프(Och-Ziff) 관계자는 지난해 가을 한 연기금으로부터 한 통의 항의 전화를 받았다. 오크-지프가 운영하는 네 개 펀드 중 한 개 펀드가 당시 S&P500지수의 상승률을 크게 웃도는 수익률을 기록한 게 화근이었다. 이 펀드에 투자한 연기금 관계자는 “무리하게 운용한 게 아니냐”며 “같은 전략을 사용했을 때 주가가 예상과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면 그만큼 손실이 발생하고 그 책임은 누가 지느냐”고 따져물었다.

수익을 내고도 항의를 받은 황당한 전화 한 통. 이는 금융위기 이후 3년간 미국 헤지펀드 업계가 경험하고 있는 극적인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민첩하고 다양한 투자 전략을 통해 높은 수익률을 냄으로써 일반 뮤추얼펀드와는 다른 시장을 형성했던 헤지펀드가 더 이상 과거의 성공모델을 지속할 수 없게 됐다는 뜻이다.

◆절대 수익률서 상대 수익률로

월스트리트에서 처음 헤지펀드라는 용어를 만든 사람은 알프레드 존스라는 언론인 출신 펀드매니저다. 1949년 존스는 주가가 오를 것으로 생각하는 주식은 사들이고(롱포지션), 하락할 것으로 예상되는 주식은 공매도(쇼트포지션)하는 펀드를 만들었다.

시장 움직임에 관계없이 수익을 거두는 구조라며 자신의 펀드를 ‘헤지된(hedged) 펀드’라고 불렀다. ‘절대수익’이라는 용어도 여기서 나왔다. 이른바 ‘롱쇼트전략’을 통해 위험을 분산,절대로 손실을 보지 않는 메커니즘을 만들었다는 뜻이다.이후 헤지펀드는 다양한 투자전략을 구사하는 펀드를 통칭하는 말이 됐지만 롱쇼트전략은 여전히 헤지펀드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투자전략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2008년 금융위기와 유럽 재정위기를 겪으면서 롱쇼트전략은 더 이상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롱쇼트전략으로 돈을 벌기 위해서는 반대로 움직일 것으로 예상되는 종목들이 있어야 하는데 전 세계 주가가 정부 정책과 거시경제 지표에 따라 한 방향으로 움직이다보니 돈을 벌 수 있는 여건이 형성되지 않고 있기 때문”(헤지펀드 크레인파트너스 리처드 한 대표)이다. 시장조사회사 바클레이헤지에 따르면 지난해 롱쇼트전략을 사용하는 헤지펀드들의 평균수익률은 -4.5%였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마케팅 전략도 달라지고 있다. 헤지펀드의 마케팅 담당자들은 ‘절대수익’이라는 말 대신 전체 시장 수익률에 비해 높은 수익률을 기록했다는 ‘상대수익률’을 내세우고 있다.

◆빠져나가는 돈이 더 많다

기업 인수·합병(M&A)과 같은 이벤트에 초점을 맞추거나 거시경제의 흐름에 투자하는 전략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M&A, 기업분할 등 호재성 재료를 활용하는 전략은 기업금융활동이 줄어들면서 이벤트 자체가 감소해 함께 위축됐다.

거시경제의 흐름에 베팅하는 전략은 경제위기로 불확실성이 더 높아졌다. 유럽 정치 지도자들의 말 한마디에 글로벌 경제가 휘청거리는 현상이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2008년 금융위기 당시 서브프라임모기지의 하락에 베팅해 대박을 터뜨렸던 폴슨앤코의 존 폴슨이 지난해 미국 경제 회복에 베팅했다 50%의 손실을 기록한 게 대표적이다.

돈 벌 곳이 사라지다보니 톰 크루즈가 제작하는 영화에 투자(로레이트 트러스트)하거나 농지에 투자(소로스펀드)하는 헤지펀드들도 생겨나고 있다.

저조한 수익률 때문에 투자자들은 자금을 회수하고 있다. 세계 최대 헤지펀드 중 하나인 맨그룹은 최근 지난해 4분기에만 자산운용규모가 9.5% 줄었다고 밝혔다. 헤지펀드리서치에 따르면 지난해 4분기 헤지펀드 업계에 유입된 돈보다 빠져 나간 돈이 더 많았다. 1억2700만달러 순유출을 기록한 것. 금융위기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2009년 2분기 이후 첫 순유출이었다. 2조달러에 달하는 산업 전체 규모에 비하면 순유출 규모는 0.007%에 불과하다. 하지만 “헤지펀드 투자자들의 인내력이 한계에 도달했다는 것을 보여주기엔 충분하다”고 월스트리트저널은 분석했다. 지난 3년간 헤지펀드들의 연평균 수익률은 7.9%로 S&P500 지수 상승률 14.1%에 크게 못 미쳤다. 특히 2011년에는 5%가 넘는 손실을 기록했다.

◆작고 빨랐던 헤지펀드의 기업화

그렇다고 헤지펀드산업이 사라질 것으로 보는 사람은 없다. 연기금 등 기관투자가들이 헤지펀드와 같은 고수익상품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공적 연기금들은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로 수년 내에 최소 1조달러를 더 벌어야 약속한 연금을 지급할 수 있다.

하지만 금리는 사실상 ‘제로’인데다 주식시장은 변동성 장세가 이어지고 있다. 헤지펀드 외에는 대안이 없다는 얘기다. 과거에는 금융자산 100만달러 이상의 개인 고액순자산보유자(HNWI)가 헤지펀드들의 주고객이었지만 지금은 2조달러의 헤지펀드 자산 중 약 60%가 연기금 등 기관투자가들의 돈인 것으로 전문가들은 추산하고 있다.

주고객층이 바뀌면서 헤지펀드의 의사결정도 ‘기업화’하고 있다. 과거 많아야 3~4명의 매니저들이 빠르게 의사결정을 내리고 투자를 집행하던 관행에 변화가 일고 있는 것. IT 인프라를 구축하고 사내 변호사와 회계사까지 고용하는 등 일반 기업과 유사한 절차를 밟는 기업이 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안정적 운용을 중시하는 연기금 고객들이 증가하자 헤지펀드들도 과거처럼 과감한 베팅을 하지 못하고 있다”며 “헤지펀드와 뮤추얼펀드 사이의 경계가 점차 사라지고 있다”고 말했다.

뉴욕=유창재 특파원 yoocoo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