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여록] 일본은 한국 대기업 배우려는데…
31일 도쿄 치요다구의 한 호텔에 마련된 기자회견장. 일본 2위 조선업체인 유니버설조선과 7위인 IHI마린유나이티드의 최고경영자가 나란히 입장했다. 발표내용은 오는 10월까지 양사가 합병한다는 것. 2008년 시작된 합병 논의가 4년 만에 최종 타결됐다는 것을 대외에 알리는 자리였다. 대략적인 발표가 끝난 뒤 기자들이 질문했다.“합병 배경은 무엇입니까?” 미시마 신지로 유니버설조선 사장의 답변은 간결했다. “이미 한참 뒤처지긴 했지만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한국 조선업체들을 겨냥한 발언이었다.

두 회사가 한 살림을 차리면 세계 7위 수준으로 올라서게 된다. 그래도 한국 조선업체들과는 아직 격차가 크다. 작년 한 해 한국업체들이 1360만CGT(표준화물환산톤수) 규모의 수주를 따내는 동안 일본의 수주량은 150만CGT에 그쳤다. 거의 10분의 1 수준이다. 합병 자체만으로는 큰 위협이 되지 않을 정도다. 작년에도 세계 1위부터 6위까지는 모두 한국업체였다.

전자업계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일본 최대 반도체 업체인 엘피다는 미국의 마이크론테크놀로지와 대만 난야를 묶는 3각 합병을 추진 중이다. 삼성전자 하이닉스 등 한국업체들과의 ‘치킨게임’에서 살아남기 위한 고육책이다. 도시바와 소니 히타치 3개 일본 전자업체도 작년 하반기부터 중소형 액정패널 사업을 통합하는 협상을 시작했다. 역시 삼성 LG 등 한국기업이 타깃이다. 현대자동차의 약진이 두드러지면서 일본 자동차업체 간 합병 얘기도 심심찮게 흘러 나온다. 일부 업종에 국한된 일이긴 하지만 어느덧 한국기업은 일본기업들이 떼로 덤벼야만 이길 수 있는 대상이 된 셈이다.

일본 언론들도 자국 기업의 대형화를 부추긴다. 지향모델은 한국이다.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한국 산업구조가 1,2개 ‘대표선수’위주로 재편된 것처럼 일본기업들도 덩치 키우기에 나서야 한다”(닛케이비즈니스)는 보도까지 나올 정도다.

반면 최근 들어 한국에선 다른 이유로 ‘한국 대기업’이 화제다. 한국경제를 망친 주범으로 몰리는 형국이다. 대기업 위주의 경제체제가 갖는 한계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공공의 적’ 수준으로 몰아붙여 경영의욕마저 꺾으면 곤란하지 않을까. 한국 대기업을 바라보는 한·일 간 온도차가 극심한 요즘이다.

안재석 도쿄 특파원 yag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