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과 나무' 함께 봐야 진정 눈 밝은 사람
지식인들은 대개 말을 잘한다. 웬만큼 지식이 있고 책을 읽은 사람이면 갖가지 논리에 익숙해져 대화에서 좀처럼 남에게 지지 않는다. 남의 말뜻은 다 알지 못해도 된다. 총론을 말하면 각론으로 맞서고 나무를 얘기하면 왜 숲을 못 보느냐고 따지면 그만이다. 대화하다 보면 참으로 덧없다는 생각에 허탈감마저 들 때도 있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은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과 사단칠정(四端七情)에 대해 토론하면서 이쪽을 말하면 저쪽에 서고 저것을 말하면 이것으로 받는 고봉의 토론 자세를 두고 마치 숨바꼭질하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퇴계집(退溪集)》의 ‘기명언에 답하다(答奇明彦)’를 보자. 퇴계는 말을 타고 가는 사람을 비유해 이렇게 말한다.

‘사람이 말을 타고 출입하는 것으로 리(理)가 기(氣)를 타고 운행함을 비유한 고인(古人)의 설명이 참으로 좋습니다. 대개 사람은 말이 아니면 출입하지 못하고 말은 사람이 아니면 길을 잃게 되니, 사람과 말이 서로 없어서는 안 되고 떨어질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말을 타고 가는 모습을 가리켜 말하는 사람이 혹 범범하게 전체를 가리켜서 간다고 말하면 사람과 말이 모두 그 가운데 있으니 사단과 칠정을 하나로 합쳐서 말하는 경우가 이것이고, 혹 사람이 가는 것만을 가리켜 말하면 굳이 말을 아울러 말하지 않더라도 말이 가는 것은 그 가운데 있으니 사단이 이것이고, 혹 말이 가는 것만을 가리켜 말하면 굳이 사람을 아울러 말하지 않더라도 사람이 가는 것은 그 가운데 있으니 칠정이 이것입니다.’

그러면서 퇴계는 고봉의 토론 자세를 주자가 말한 숨바꼭질과 같다고 지적한다.

‘지금 공은 내가 사단·칠정을 둘로 나누어 말하는 것을 보면 언제나 하나로 합쳐서 말한 것을 인용해 공박하니, 이는 “사람이 가고 말이 간다”라고 하는 말을 듣고 사람과 말은 하나이니 나누어 말해서는 안 된다고 힘써 주장하는 격입니다. 또 내가 칠정을 기가 발한 것으로 말하면 리(理)가 발한 것이라고 힘써 주장하니 이는 “말이 간다”고 하는 말을 듣고 굳이 “사람이 간다”고 하는 격이며, 내가 사단을 리가 발한 것이라고 말하면 또 기가 발한 것이라고 힘써 주장하니 이는 “사람이 간다”고 하는 말을 듣고 굳이 “말이 간다”고 하는 격입니다. 이는 바로 주자(朱子)가 말한 ‘숨바꼭질(迷藏之)’과 같은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합니까.’

퇴계와 고봉은 토론을 벌이면서 사단과 칠정에 대해 두 사람 모두 “나아가 말한 바가 다르다(所就而言之者不同)”고 했다. 사단과 칠정은 내용은 같고 취지만 다르다는 뜻인데, 두 사람은 상반된 의미로 사용했다. 고봉은 사단과 칠정은 말만 다를 뿐 내용은 똑 같은 정인데 다르다고 하면 사단과 칠정 두 가지 정이 우리 마음 속에 있는 것처럼 오인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반면에 퇴계는 사단과 칠정이 다 정이지만 그 말의 취지는 각각 다르니, 그 개념을 달리 정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퇴계는, 이를테면 흰 돌에서 흰색과 단단한 형질을 나눌 수 없지만 희다고 할 수도 있고 단단하다고 할 수 있듯이 사단의 개념도 리와 기가 합일한 상태에서 리만 도출한 것이라 생각했다.

두 사람의 토론을 보면, 고봉은 내용을 중시해 사단과 칠정은 말만 다를 뿐 실상은 같은 것이라고 주장하고 퇴계는 개념을 중시해 내용은 같더라도 개념이 다르므로 같음을 전제한 위에서 다름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람이 말을 타고 출입하는 모습을 가지고 리와 기의 관계를 비유한 것은 주자의 설명이다. 사람이 말을 타고 갈 때 사람이 간다고 할 수도 있고 말이 간다고 할 수도 있다. 사람은 말 위에 가만히 앉아 움직이지 않아도 우리는 사람이 간다고 한다. 실제로 움직여서 가는 것은 말이므로 말이 간다고 할 수도 있지만 사람이 말을 타고 서울로 갈 때 대개 말이 서울로 간다고 하지는 않는다. 이것이 리발(理發), 즉 리가 발한다는 것이니, 리는 발함이 없이 발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물을 볼 때 전체만 보기도 하고 부분만 보기도 한다. 때로는 어느 한 쪽에만 초점을 맞추고 다른 것들은 모두 무시해야 할 때도 있다. 예컨대 아름다운 강의 경치를 볼 때 가장 먼저 전체를 한 눈에 담아서 아름답다고 느끼고, 그런 다음에 잔잔히 흐르는 강물이며 유유히 헤엄치는 흰 해오라기며 강가에 선 버드나무 등을 한 부분씩 뜯어서 본다. 이렇듯 전체도 보고 부분도 보아 사물의 정추(精粗)와 본말(本末)을 다 알아야 참으로 눈 밝은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전체를 본다고 해서 부분이 어디로 달아나는 게 아니고 부분을 본다고 해서 전체가 없어지는 게 아니니, 전체를 볼 때 부분을 못 볼까 지레 걱정하고 부분을 볼 때 전체를 못 볼까 미리 염려해 전체를 볼 때는 부분에 얽매이고 부분을 볼 때는 전체에 연연할 필요는 없다. 다만 전체만 파악하고 부분을 무시하거나 부분에 집착해 전체를 부정해서는 안 될 뿐이다.

전체를 봐야 할 때는 전체를 보고 부분을 봐야 할 때는 부분을 보아 능소능대(能小能大)하는 사고의 원활한 전환이 없으면, 널빤지를 등에 짊어진 사람처럼 늘 한 쪽만 바라보는, 소견이 꽉 막힌 사람이 됨을 면치 못할 것이다.

이상하 < 고전번역교육원 교수 >

▶원문은 한국고전번역원(www.itkc.or.kr)의 ‘고전포럼-고전의 향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