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벼랑 위의 사케' 장인의 혼 품고 해외서 길 찾는다
옛날 ‘금복주’가 떠올랐다. 둥글둥글한 몸집에 미소 띤 얼굴. 양쪽 볼과 코 끝은 발그레하다. 기분좋게 한 잔 걸친 듯한 모습. 일본 유명 ‘사케(酒·일본식 청주)’ 메이커인 ‘다카시미즈(高淸水)’의 가토 히토시 공장장이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넉넉한 인상을 믿고 하나마나한 질문을 했다. “맛의 비결이 뭔가요?” ‘허허’ 웃고 말줄 알았는데 대답이 예상 밖이다. “가르쳐 드리고 싶어도 가르쳐 드릴 방법이….” 노하우는 직원들의 몸 구석구석에 녹아 있다고 했다. 수십년 동안 다져진 예민한 감각. 이것이 일본 동북부 6개현에서 판매량 1위를 달리는 다카시미즈의 핵심역량이라고 했다.

일본 아키타현에 본사와 공장을 두고 있는 다카시미즈는 1944년 설립됐다. 1980년대엔 당대 최고 여배우가 광고모델로 나올 정도로 잘나갔다. 그러나 일본 경제가 ‘잃어버린 10년’의 터널에 접어들면서 서서히 힘이 빠졌다. 사케 시장이 다 그랬다. ‘아저씨들이 먹는 술’이라는 이미지까지 더해져 점점 젊은 소비자들의 손에서 멀어졌다. 고민하던 사케 업체들은 최근 하나둘 해외에서 돌파구를 찾기 시작했다.

◆“똑같은 술을 빚는 날은 없다”

공장 견학 도중 가토 공장장이 누룩을 뜨는 나무 궤짝을 가리켰다. 잘 살펴 보라고 했다. 평범했다. 공장장의 채근에 다시 들여다보니 가운데가 약간 볼록했다. 그게 노하우라고 했다. 건조와 발효가 가장 잘되는 최적의 ‘볼록함’이라는 설명과 함께.

사케 제조공정은 복잡했다. 계속 갸우뚱거리자 직원 한 명이 종이 한 장을 들고 왔다. 간략하게 정리된 개요도였다. 한국에서 흔히 ‘사케’라고 하는 일본식 청주(淸酒·쌀로 빚은 술). 일본에서는 ‘니혼슈(日本酒)’라고 부른다. 청주의 종주국임을 자처하는 용어다. 사케는 ‘양조주’에 속한다. 와인 맥주처럼 원료를 발효시켜 만든다. 발효는 효모가 과일과 곡물에 포함된 당분을 알코올과 탄산가스로 분해하는 과정이다. 기본 원리는 동일하다. 하지만 사케 제조공정은 맥주나 와인에 비해 난이도가 높다. 와인은 원료인 포도에 당분이 있어 포도즙에 효모만 첨가하면 그대로 발효된다. 맥주는 원료인 보리에 당분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맥아를 넣어 보리가 가진 전분을 당분으로 바꾸는 작업을 먼저 거친 뒤 발효작업을 한다. 사케의 원료인 쌀도 당분이 적다. 그래서 맥주처럼 ‘당화(糖化)’과정을 밟아야 한다. 다른 점은 맥주와 달리 당화과정과 발효과정이 동일한 탱크 속에서 이뤄진다는 것. 두 공정 간의 밸런스를 맞추는 것이 핵심 기술이다.

가토 공장장은 “단 하루도 똑같은 술이 빚어지는 날은 없다”고 했다. 습기 바람 기온 등 자연환경의 미묘한 차이가 술맛을 매번 바꾼다는 얘기. 그런 ‘변덕’을 얼마나 잘 조절하느냐가 니혼슈 장인의 실력이다. 다카시미즈는 이런 노하우를 잃지 않기 위해 본사 공장 내에 아예 옛날 방식으로 술을 빚는 시설을 따로 마련해 놓았다.

◆사케의 고전

일본엔 동네마다 ‘지자케(地酒)’라고 하는 특유의 사케가 있다. 종류만 2000여개에 달한다. 일본 음식문화의 자랑거리 중 하나인 사케는 최근 빛이 바래는 모습이다. 일본 국세청이 조사해보니 일본내 사케 소비량은 1970년 153만2000㎘에서 2009년엔 61만7000㎘로 줄었다. 시장 규모가 절반 이하로 쪼그라든 것이다. 젊은 세대의 이탈이 치명타였다. 사케를 만드는 사업장 수도 매년 줄고 있다. 1956년 4135곳이던 사업장이 2009년엔 1906곳으로 급감했다.

가뜩이나 어려운 마당에 대지진까지 겹쳤다. 일본 동북부의 200여개 양조장 가운데 절반가량이 피해를 입었다. 방사능 오염이라는 복병도 만났다. 엎친데 덮친 격이다. 일본 동북부 지역에서 생산된 쌀에서 방사성 물질인 세슘도 검출되고 있다. 소비자들이 하나둘 떨어져 나가고 있다.

최근엔 한국산 ‘막걸리’까지 사케를 궁지에 몰고 있다. 한류를 등에 업은 막걸리가 일본 내수시장을 크게 잠식했다. 작년 한국의 막걸리 수출액은 5276만달러였다. 4년 전인 2007년(290만달러)에 비해 20배가량 증가했다. 수출 막걸리의 92%(4842만달러)는 일본으로 흘러들어왔다.

◆해외에서 돌파구 찾는다

다카시미즈는 최근 해외 마케팅을 위해 한국 주류업체인 진로와 손을 잡았다. 자체 역량으로 해외 시장을 뚫는 것은 무리라는 판단에서다. 진로는 올해부터 해외 전시회 등에 다카시미즈의 사케도 포함시킬 계획이다. 다른 사케 업체들의 발걸음도 바쁘다. 내수만으로는 회사의 장래가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이와테현의 사케 제조기업인 ‘아사비라키’는 서울에 ‘사케야 코리아’라는 지사를 만들었다. 이시카와현의 ‘후쿠미쓰야’는 프랑스 최대 슈퍼체인인 까르푸와 제휴해 유럽시장 공략에 나섰다.

일본 정부도 소매를 걷어붙였다. 일본 외무성은 작년부터 해외파견을 앞둔 신임대사와 총영사를 대상으로 한 연수 프로그램에 일본술에 관한 강의를 포함시켰다. 외무성은 이와 함께 해외공관의 주요 파티에 가능하면 와인 대신 사케를 내기로 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일식 전문점 등에 업소용으로만 제공되던 사케가 해외에선 가정용으로도 인기를 끌며 시장을 점차 넓혀가고 있다”고 전했다.

◆도정률에 따라 다이긴조 > 긴조 > 혼조조

다양한 사케의 세계

사케는 와인만큼 어렵다. 종류도 많고 제조공정도 복잡하다. 어느 정도 공부를 해야만 눈에 들어오는 술이다.

사케를 빚는 데 사용되는 쌀은 밥솥에 들어가는 쌀과 다르다. 겉을 많이 깎아내야 하기 때문에 일반쌀에 비해 알갱이가 크다. 사케는 도정률(벼의 낱알을 깎아낸 정도)에 따라 ‘다이긴조(大吟釀)’와 ‘긴조(吟釀)’, ‘혼조조(本釀造)’ 등으로 나뉜다. 다이긴조가 가장 도정률이 높다. 그만큼 사용되는 쌀알의 크기가 작다는 뜻이다. 다카시미즈의 히라카와 준이치 전무는 “다이긴조는 혼조조 등 낮은 등급의 술에 비해 네 배 이상의 쌀이 들어간다”고 설명했다.

사케 술병에는 ‘도정률’ 대신 ‘정미율(쌀의 표피를 깎아내고 남은 비율)’이라는 용어가 사용된다. 서로 반대되는 개념이다. 예를 들어 도정률이 40%인 술의 정미율은 60%다. 보통 정미율이 50% 이하인 술을 ‘다이긴조’라 부르고, 50~70% 사이는 ‘긴조’, 70% 이하는 ‘혼조조’라고 한다.

쌀로만 만들었는지, 아니면 특유의 향을 내는 알코올을 섞었는지에 따라서도 명칭이 달라진다. 쌀과 누룩만으로 빚은 술에는 ‘순수하다’는 의미로 ‘준마이(純米)’라는 접두어가 붙는다.

아키타현=안재석 특파원 yag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