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가 주룩주룩 내린 쌀쌀한 23일 오후 5시. 서울 을지로 하나은행 본점 1층을 가득 메운 840여명의 청중들 기립박수가 수 분간 이어졌다. 김석동 금융위원장, 정운찬 동반성장위원장 등 정부와 손길승 SK텔레콤 명예회장, 박용성 대한체육회장 겸 두산중공업 회장 등 재계 대표들이 모두 일어서서 그를 맞았다. 어윤대 KB금융 회장, 한동우 신한금융 회장, 이팔성 우리금융 회장, 박현주 미래에셋금융 회장 등 금융계 대표들도 있었다. 상기된 표정으로 등장한 노신사는 한동안 다소 수줍은 듯 주위를 둘러봤다.

직원 20여명의 단자회사를 42년 만에 2만3000여명이 근무하는 국내 대표 금융그룹으로 성장시킨 ‘승부사’ 김승유 하나금융 회장이었다. 이날 그의 퇴임식에서 외빈을 대표로 단상에 올라선 김석동 위원장은 “오랜기간 금융계의 맏형 같은 분이 떠나게 됐다”며 아쉬움을 표현했다. 그는 그러나 “그분의 47년간 노력으로 대한민국의 금융산업은 크게 발전했다”며 “오늘은 우리 금융계가 처음으로 많은 경험과 경륜이 풍부한 한 원로를 배출하게 되는 뜻깊은 날이다”고 말했다.

김 회장이 이날 하나금융그룹을 떠났다. 좌고우면하지 않고 툴툴 털고 떠났기에 더욱 빛난 퇴임식이었다. 그의 아름다운 퇴장을 보기 위해 장관급 3명과 재벌과 금융계 대표들이 한걸음에 달려왔다. 대학시절 그를 가르치던 조익순 고려대 명예교수(89)도 불편한 몸을 이끌고 행사장에 나타나 ‘축(祝) 아름다운 마무리’라고 팻말이 붙은 꽃다발을 줬다.

김 회장은 1971년 단자회사인 한국투자금융을 설립한 뒤 1991년 은행으로 전환시켜 1998년 충청은행, 1999년 보람은행, 2002년 서울은행, 2012년 외환은행 등을 잇달아 인수한 하나금융 성장의 산 증인이다. 김 회장은 올해 외환은행 인수를 성사시킨 뒤 김정태 하나은행장에게 회장 자리를 물려주고 하나고 이사장과 미소금융중앙재단 이사장직만 맡기로 했다. “금융인이 안 되었더라면 평생 교사로 살고 싶었을 것”이라던 그는 또 다른 꿈을 향해 새로운 여정에 들어간 것이다.

그는 이날 퇴임사에서 “수 차례 인수·합병(M&A) 과정에서 사무실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잠깐씩 눈을 붙여가며 밤낮없이 일했던 여러분의 모습을 눈에서 지울 수 없다”고 지난날을 회고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는 “그동안 고객만이 우리를 지켜줄 수 있다고 믿어 왔다”며 “고객 중심의 사고, 시장을 중시하는 영업, 성과에 따른 보상체계 등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최상의 가치로 생각하고 실천해 왔다”고 말했다. 정진석 추기경도 이날 김 회장에 대해 “경제인으로 종교인 못지 않은 깊은 신앙심을 가지고 있고 불쌍한 사람에 대한 동정심, 인간애가 아주 깊은 분이다”며 “그의 퇴임은 아쉽지만 그의 고매한 인품이 사회 구석구석을 비춰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김 회장은 퇴임식 후 김정태 신임 하나금융 회장에게 하나금융그룹의 기를 전달했다. 김정태 회장은 “고객 만족을 실천하고 주주 가치 실현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김승유 회장은 이날 받기로 한 퇴직공로금 35억원 전액을 어려운 이웃을 위해 기부하기로 했다.

안대규 기자 powerzani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