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기업들이 재정위기 여파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그러나 경기 불황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 회사도 있다. 독일의 광학 전문업체 칼차이스가 그중 하나다. 칼차이스는 지난해 42억3700만유로(6조280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전년 대비 41.8%(13억유로)나 급증했다. 회사 설립 후 처음으로 40억유로를 돌파하기도 했다. 2년 만에 매출이 두 배로 늘어났을 뿐 아니라 순이익도 3억8600만유로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SLR카메라 원조'  2차대전도 넘겼는데…"유럽 경제위기 쯤이야"
미하엘 카슈케 칼차이스 최고경영자(CEO)는 독일 대표 일간신문 프랑크푸르터알게마이네차이퉁과의 인터뷰에서 “아시아와 미국 시장에서 고급 광학제품 수요가 급증한 덕을 톡톡히 봤다”고 설명했다. 그의 걱정은 매출, 이익이 아니다. 사람이다. 올해 초 50여명의 광학 전문인력을 새로 채용할 계획이었지만 적절한 능력을 갖춘 인원을 아직 20명밖에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기술인재가 회사의 모든 것”

1846년 독일 예나에 칼 차이스와 에른스트 아베 등이 설립한 칼차이스는 일반 및 산업용 광학제품, 현미경, 의료용 기기, 카메라 렌즈 등을 생산한다. 초정밀 고품질 광학렌즈 업체로 유명하다.

하셀블라트, 롤라이, 야시카, 소니, 로지텍 등이 사용하는 일반 광학렌즈는 물론 2014년 허블우주망원경을 대체할 제임스웹우주망원경의 초정밀 관측렌즈에도 칼차이스의 기술력이 담겨 있다. 칼차이스는 또 영화제작용 고급 렌즈 시장의 90%를 점유하고 있다. 삼성전자가 주고객인 반도체 계측기기 분야에서도 80%가 넘는 시장을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다. 직원 수는 2만4000명이다.

칼차이스는 설립 당시부터 ‘혁신’을 중시해 각종 첨단기술 개발과 도입에 심혈을 기울였다. 혁신과 기술에 대한 집착은 자연스럽게 인재 중시 문화로 이어졌다. 160년이 넘은 칼차이스의 기업 역사는 ‘좋은 렌즈를 만들기 위한 인재 확보 전쟁의 역사’라는 표현도 나온다.

19세기 후반 칼 차이스가 20여명의 렌즈 제조 장인들과 회사를 처음 만들었을 당시 칼차이스는 ‘독일 내에서 가장 기술력이 뛰어나고 혁신적인 신기술을 도입한 현미경을 만드는 업체’로 이름을 얻었다. 20세기 초에는 세계 최대 카메라 생산기업이 됐다. 2차대전 직전에는 세계 최초로 35㎜ 일안반사식(SLR) 카메라를 개발했다.

1·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라이카, 슈나이더 등과 함께 독일의 핵심 군수업체로 불릴 정도로 높은 기술력을 자랑했다. 레이더나 전파추적 기술이 초기 단계여서 폭탄을 떨어뜨리는 데 광학장비가 핵심적인 역할을 하던 때였다. 잠망경의 우수성이 잠항 능력 못지않게 잠수함의 성능을 좌우하는 기준이 되기도 했다.

○분단의 고통을 자양분으로

광학 분야에서 기술 전문 기업으로 입지를 다지던 칼차이스는 2차 세계대전 뒤 위기를 맞았다. 독일 동부지역 예나에 있던 칼차이스의 렌즈 기술인력을 차지하기 위해 미국과 소련이 쟁탈전을 벌인 것. 1945년 6월 미군은 동부 독일 지역인 예나로 트럭 수십대를 보내 칼차이스의 핵심 인력 84명과 그 가족들을 빼왔다. 제품 설계도 등 8만부의 서류와 기자재도 실어갔다. 서독은 오버코헨이란 조그만 도시에 칼차이스 출신 인력을 이식해 현미경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소련은 예나에 있던 카메라 생산시설을 국영기업으로 만들어 사업을 계속했다. 소련은 광학산업 육성을 위해 200여명의 연구인력을 소련으로 강제 이주시키기도 했다. 동·서독에 각각 자리잡은 두 개의 칼차이스는 냉전시기 세계 60개국에서 상표권을 둘러싼 법정 싸움을 벌이는 등 갈등을 빚었다.

우수 인력을 놓고 미·소 간 쟁탈전이 벌어지며 회사가 둘로 쪼개진 것이었다. 하지만 1990년 독일 통일 이후 칼차이스는 다시 하나로 합쳐졌다. 동·서독 칼차이스가 통합될 때의 화두(話頭)도 기술력과 품질이었다. 동독과 서독지역 공장이 각각 어떤 분야의 핵심 인력을 많이 보유하고 있느냐에 따라 사업이 재배치됐다. 이에 따라 렌즈 제조에 집중해온 예나 공장은 기초 분야인 현미경 사업부와 의료기기 사업부를, 서독의 오버코헨은 반도체 사업부와 산업 측정기 부문을 맡았다. 칼차이스는 동독지역 직원 6만명을 3000명으로 줄일 때도 각종 재교육을 통해 주변 광학 관련 업체에서 근무토록 하기도 했다.

○160년을 키워온 산학협력

칼차이스는 설립 때부터 ‘산학협력의 모범사례’라고 부를 만한 전통을 가꿔왔다. 예나대학에서 강의하던 물리학자 아베가 렌즈제작소를 운영하던 차이스를 찾아가 현미경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자 아예 공동으로 회사를 설립한 것이다. 아베는 좋은 현미경이 필요했고, 차이스는 아베의 광학이론을 기반으로 더 과학적이고 정밀한 현미경을 제작할 수 있었다.

이런 전통에 따라 칼차이스는 현재 전 세계 45개국에 제조공장을 두면서 현지 대학들과 협력관계를 구축하고 있다. 인도에서는 의료기기 관련 기술 연구를 진행하고, 중국에선 계측·현미경 관련 기술개발 센터를 운영하는 등 개별 사업부마다 각 지역의 유명 대학과 연구기관에 자금을 지원하며 공동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매년 연간 수익의 20%를 칼차이스재단에 배당해 주요 대학과 연구기관의 학술 연구자금으로 사용한다.

1953년 세계 최초로 미세 수술이 가능한 수술현미경을 개발하고, 1973년 최초의 고정밀 3차원 좌표 측정기를 선보일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산학협력의 전통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혁신(Innovation)’이라는 학술지를 간행하며 학계 최신 동향을 사업에 접목하는 작업도 진행하고 있다. 이와 함께 물리학, 레인지 광택, 리더십 등 200여개 프로그램을 사내대학처럼 운영하며 직원 기술교육에 힘쓰고 있다.

카슈케 CEO는 올해 신년 연설에서도 “기업은 언제나 새로운 아이디어를 활용해 혁신을 이룰 수 있는 학자, 전문가 집단과 공생체제를 구축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김동욱 기자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