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관 향수 달랜 재래시장 순댓국
지난 22일 낮 12시, 서울 도렴동 외교통상부 1층 구내식당. 이명박 대통령과 재외 공관장 등 200여명이 참석한 오찬 행사가 열렸다. 덕담이 오가면서 20여분이 지나자 이날의 메인 메뉴가 각 테이블로 날라졌다. 샤토 탈보와 호주산 송아지 안심스테이크나 구절판과 신선로 등이 어우러진 화려한 오찬이 아니었다. 이날 오찬은 소박한 순댓국 한 그릇과 돼지 머릿고기, 깍두기 반찬 등이 전부였다.

외교부 관계자는 23일 “대사들이 외국에서 먹기 힘든 음식을 고르다 서민적 취향의 대통령 기호도 감안해 정을 느낄 수 있는 순댓국밥과 순대를 추천하게 됐다”고 귀띔했다.

재외공관장 오찬 행사의 ‘메인 셰프’는 서울 서대문 영천시장 안 33㎡(10평) 규모의 석교식당에서 20년간 영업해온 주인 이은모 씨(60)와 황계숙 씨(59·사진) 내외. 이들이 이 대통령이 참석하는 정부 행사에 순댓국을 제공한 건 이번이 두 번째다.

외교관 향수 달랜 재래시장 순댓국
지난해 12월19일, 행정안전부 주최로 광화문 정부청사 구내식당에서 이 대통령과 김황식 국무총리 등 정부 내 최고위급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이씨 부부가 처음으로 순댓국 200그릇을 만들어 내놨다. 이씨는 “지난해엔 1인당 밥값 6000원과 ‘격려금’을 받았다”며 “이번엔 격려금을 사양했다”고 말했다.

이들 부부는 지난 21일 서울 마장동에서 돼지 내장과 머릿고기를 직접 사다 사골로 우려낸 육수로 순댓국 200인분을 만들었다. 다음날인 22일 오전 8시, 만들어놓은 순댓국과 머릿고기, 깍두기, 김치, 당근, 오이, 양파 등을 외교부 구내식당으로 옮긴 뒤 이씨 부부와 구내식당 직원 15명은 오찬시간에 맞춰 밥을 새로 짓고 순댓국을 끓여 냈다.

부인 황씨는 “외교부 측에서 매운 고추를 좀 적게 넣고 너무 맵지 않게 해달라는 것 외에 따로 주문은 없었다”고 말했다.

석교식당이 이번 외교부 재외공관장 오찬을 준비하게 된 건 20년 식당을 운영해온 식당주인의 내공에다 그동안 현 정부와 쌓아 놓은 끈끈한 인연 덕택이었다. 처음 석교식당을 찾은 현정부 인사는 유인촌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2008년 겨울 유 장관은 재래시장 활성화 차원에서 직원들과 영천시장을 방문했다가 우연히 이곳에 들렀다. 순댓국 맛에 반한 유 장관은 이후에도 몇 차례 더 다녀갔다.

이후 행안부도 재래시장 활성화를 위해 영천시장과 자매결연을 맺었고 맹형규 행안부 장관과 직원들도 종종 들러 식사를 했다. 이런 인연 덕분에 지난 18일 외교부는 석교식당 순댓국을 최종 외교부 재외공관 오찬 메뉴로 결정했다.

이씨 부부는 “재래시장 한 모퉁이에 있는 좁은 식당에서 대통령 행사에 음식을 두 번이나 대접할 수 있어서 영광”이라며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김우섭 기자 dut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