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창대군 태어나자 갈라서는 北人들, 결국 '피바람'이…
대선과 총선의 해를 맞아 정당 내에서는 파벌에 따른 이합집산이 계속되고 있다. 조선시대도 예외가 아니었다. 1575년(선조 8) 동인과 서인의 분당으로 붕당정치가 시작된 이래로 당파 간의 경쟁과 분열이 끊이지 않았다.

선조 후반 서인과 북인 간에는 치열한 정치적 대립이 있었으며, 북인이 집권한 후에는 그들 간에 분열이 일어났다. 적장자 영창대군의 출생으로 선조의 후계자 계승 구도가 복잡하게 전개되면서 북인의 분열은 가속화됐다.

조선시대 당쟁의 역사를 가장 객관적이고 체계적으로 정리했다고 평가받는 이건창(1852~1898)의 《당의통략(黨議通略)》에는 당시의 당파 분열과 인물 간 갈등 요인 등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

‘이에 이산해와 홍여순을 우두머리로 하는 자는 대북이라 하고 남이공과 김신국을 우두머리로 하는 자들은 소북이라 했다. 소북이 왕의 견책을 받음에 미쳐 이산해와 홍여순이 또 서로 더불어 권력을 다퉈 이산해의 당은 육북(肉北)이 됐고, 홍여순의 당은 골북(骨北)이 됐다. 이이첨이 상소해 홍여순을 탄핵하자 임금은 둘을 내쫓고 다시 서인을 참여시켜 나아갔다. 얼마 되지 않아 체찰사인 이귀가 스스로 영남에서 돌아와 정인홍이 고향에 거주할 적의 불법적인 일을 논하자 정인홍이 뒤에 상소해 “신은 성혼, 정철과 더불어 서로 화목하지 못하고 또 유성룡과도 유쾌하지 못했는데 지금 그 무리가 신을 미워함이 이와 같습니다”고 했다. 인하여 성혼이 최영경을 얽어 죽이고 나라가 어려울 때 (왕의 피난처에) 이르지 않고 화의를 주장한 모든 일을 심하게 꾸짖었다. 아울러 정경세가 상중에 술을 마신 것을 탄핵했다.’

이들 간의 싸움은 이렇게 이어진다. ‘대사헌 황신이 뒤에 성혼의 무고함을 상소했는데 왕이 황신을 교체하고 조정에 있는 모든 서인을 내쫓은 뒤 간사한 성혼, 독한 정철이라는 교서를 내렸다. 유영경을 이조판서로 하고 정인홍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이항복은 평생에 당이 없었지만 이때 이르러 유영경이 이조판서가 되는 것을 막고자 했다. 그러므로 당에서 탄핵당하는 바가 됐고 정철의 심복으로 지적돼 이로써 정승직을 면하게 했다.’

위의 기록에는 북인 내의 소북과 대북, 육북과 골북의 분열상과 기축옥사, 성혼과 정철에 대한 탄핵 등을 빌미로 북인이 서인을 탄핵하고 권력을 잡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항복처럼 평생 당에 속하지 않아도 정치적 상황으로 말미암아 불가피하게 당인(黨人)이 되는 사례도 있다.

1592년 임진왜란은 왕실과 정치 세력 판도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임진왜란 초기 관군의 방어선이 뚫리면서 위기를 맞은 국왕 선조는 서둘러 피난길을 재촉하는 한편, 광해군을 왕세자로 삼고 분조(分朝·조정을 나눔) 활동을 통해 혼란한 정국을 수습하도록 했다.

18세에 왕세자로서 분조를 이끌며 대왜 항쟁에 나섰던 광해군은 강력한 주전론을 전개한 정인홍 등의 북인과 호흡이 잘 맞았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조야의 명망은 광해군에게 쏠렸고 광해군의 왕위 계승은 무난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광해군이 후궁 출신의 아들이라는 점은 선조의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선조의 마음을 파고 든 것은 어린 계비가 낳은 영창대군이었다. 영창대군의 탄생을 계기로 북인은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과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으로 분립됐다. 대북의 중심에는 정인홍, 소북의 중심에는 유영경이 자리잡았다. 정인홍은 광해군의 후계자 지명을 저지하려는 유영경을 강력히 탄핵했다.

‘정인홍이 개연히 고향에서 상소를 올려 말하기를 “유영경은 성지를 비밀로 하고 여러 재상들을 쫓았으니 이른바 여러 사람의 뜻이라는 것이 나라 사람들이 원하지 않은 것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사사로운 당들이 하고자 하지 않는 바입니까.” 왕이 심히 노해 말하기를 “인홍이 세자로 하여금 속히 왕위를 전해받게 하려고 하니 신하된 자가 차마 옛날 왕을 물러나게 하는 것을 능사로 삼는가”라고 했다. 이로부터 광해군이 매일 문안을 하면 왕은 번번이 꾸짖으며 “명나라 책봉도 받지 못했는데 어찌 세자라 하겠는가. 문안을 다시는 오지 말라”고 했다. 광해군은 땅에 엎드려 피를 토했다.’

이어 ‘대간 이효원 등은 정인홍을 탄핵해 군부를 동요시키고 골육 간의 사이를 멀어지게 한다고 탄핵하고, 아울러 이산해를 거론하고 이경전과 이이첨 등을 논해 다 귀양보냈다. 진사 정온이 상소해 정인홍을 구하려 했으나 대답이 없었다. 이때 허욱·신요는 모두 유영경을 지지했는데, 이들을 유당(柳黨)이라 이른다. 김신국 또한 유당에 들어갔고 남이공·임장은 유영경에게 붙지 않아 남당(南黨)이라 불렀다’는 대목이 나온다.

위에서 유당(柳黨), 남당(南黨)이라 하는 것은 현재 ‘친이계’ ‘친박계’라고 하는 상황과도 비슷하다. 유영경의 영의정 임명과 소북 정권의 수립은 선조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었고, 영창대군의 왕위 계승은 상당한 가능성을 보였다. 그러나 1608년 선조의 급서로 정국은 일변했다.

아직 어린 영창대군을 왕위에 올리는 것을 불안해한 선조는 마지막 유언에서 이미 왕세자로 책봉됐던 광해군을 국왕의 자리에 올릴 것을 명했다. 16년간의 세자 생활을 어렵게 청산하고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면서 정국은 일순간에 대북정권 중심으로 짜여졌다.

광해군이 불안한 위치에 있을 때 ‘정권의 실세’ 유영경을 탄핵하다가 귀양길에 올랐던 정인홍은 곧바로 석방된 후 정권을 뒷받침하는 산림(山林)의 영수로 떠오르면서 정권을 지원하는 든든한 버팀목이 됐다.

선조 사후 후계자 계승을 둘러싼 뜨거운 정쟁 속에 영창대군을 지지했던 유영경은 처형으로 생을 마감했고, 광해군을 지지했던 정인홍은 광해군 정권 수립 후 ‘왕의 남자’가 돼 정치와 사상계의 일선에 서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선조 후반 북인과 서인의 대립, 북인 내의 자체 분열이 과거 옛 이야기로만 들리지 않는 것이 오늘의 정치 현실이다.

신병주 < 건국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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