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제2의 중동특수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모래 바람이 몰아친다. 잠자는 데 모래 바람이 덮쳤고, 밥을 먹으면 모래가 씹힌다….’(1976년 9월 대림산업 중동건설 근로자의 일기) 섭씨 40도를 오르내리는 곳에서 모래바람을 헤치며 보통 오전 7시부터 자정까지 일했다. 공기 단축을 위해 철야도 밥먹 듯했다. 밤새 환하게 불을 밝힌 돌관(突貫)작업 현장을 지켜본 발주처에선 “저토록 성실한 사람들에겐 공사를 더 줘야 한다”는 말이 돌았다. 당시 기세등등하던 카다피 리비아 국가원수조차 감동해 “리비아에 오래 머물러달라”고 부탁했을 정도다.

그 무렵 중동에서 일한 우리 근로자는 한 해 최다 17만명에 달했다. 향수병에 시달려가며 피와 땀으로 벌어들인 돈은 꼬박꼬박 집으로 부쳤다. 변변한 장비도 없고 기술력도 부족했지만 근검과 도전정신만으로 중동특수를 일궈냈다.

중동진출은 1973년 삼환기업이 사우디의 163㎞ 고속도로 공사를 수주하면서 시작됐다. 1976년 현대건설이 주베일산업항 공사를 9억3000만달러에 따내면서 본격적으로 불이 붙었다. 공사비는 그 해 우리나라 예산의 25%를 넘었다. 그런 거대공사의 44개월짜리 공기를 36개월로 단축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라크를 횡단해 요르단과 시리아 국경을 잇는 ‘요-시 고속도로’ 공사도 난공사로 꼽혔다. 하루 5500명씩 근로자를 투입했으나 초기엔 별 진전이 없었다. ‘초속 30m로 불어대는 모래 폭풍을 몇 시간씩 견뎌야 했다. 도로공사에 꼭 필요한 물도 없었다. 100㎞ 떨어진 곳에서 지하수를 뽑아냈지만 이번엔 흙이 문제였다. 아무리 물을 뿌려도 흙은 뭉쳐지지 않았다.’(현대건설 사사) 여러번의 실패 끝에 가로·세로 각 100m, 높이 50㎝의 둑을 만들어 물을 붓고 며칠을 기다려 젖은 흙을 파내 사용하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이른바 ‘요-시 공법’이다. 이런 식으로 온갖 악조건을 극복하고 벌어들인 외화는 우리가 가난을 벗고 경제발전을 이루는 기반이 됐다.

건설·원전 전문인력 1만여명을 양성해 제2의 중동특수를 지원하는 방안이 추진된단다. 올해 대졸자 3500명 등 젊은층을 중동진출기업에 취업시키고, 세제와 병역 혜택을 확대해 해외근무를 유도한다는 것이다. 산업구조가 바뀌었다 해도 도전정신으로 무장하고 최일선에서 억척스럽게 뛰는 이들이 있어야 경제엔 생기가 돈다. 힘들고 험한 일은 피하면서 직업 없다고 징징대는 일부 젊은이들에게 일정 기간 중동건설현장 의무근무를 시켜보는 건 어떨지.

이정환 논설위원 j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