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가 지배하는 매트릭스 세계에도 인간만의 영역이 있다
영화 ‘매트릭스’가 처음 소개됐을 때 관객들은 컴퓨터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인간 건전지’로 살아가는 식물화한 사람들의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컴퓨터가 우리 생활을 지배하는 세상에서 사람이 컴퓨터의 부속품 역할을 하는 현상은 이미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사용자들의 기대 수준을 맞추려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인간을 부속품으로 사용해야만 하는 경우가 늘기 때문이다. 이는 컴퓨터 기술이 발전하면서 역설적으로 컴퓨터는 인간에게 더 많이 의존하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데 사람과 컴퓨터가 분업을 할 때는 흥미로운 원칙이 있다. 사람들이 어려워하는 작업이 종종 컴퓨터에는 쉽고, 사람들에게 쉬운 작업이 컴퓨터에는 어렵다. 예를 들어 회계사가 되려면 고학력자라도 수년간의 공부와 시험을 거듭해야 한다. 반면 미용사는 저학력자도 쉽게 지원하는 직업이다. 하지만 회계사 역할을 하는 프로그램이 일찌감치 나온 것에 비해 미용사 역할을 하는 컴퓨터는 여전히 만들어지지 않고 있다. 이처럼 컴퓨터 대신 모호한 작업을 수행하는 ‘인간 컴퓨터’가 속속 등장하고 있다.

천문학 분야에서는 자원봉사자들이 컴퓨터를 대신해 천문관측 데이터를 분류하고 있다. 천문관측기구 갤럭시주(http://www.galaxyzoo.org)는 우주선에서 촬영한 사진을 종류별로 구분하는 작업을 한다. 자원봉사 지원자들은 일정한 교육을 받은 뒤 시험을 통해 은하계 사진을 구분하는 능력을 검증받는다. 시험에 통과한 봉사자들이 우주 사진에서 다양한 은하를 눈으로 식별, 종류별로 구분하면 컴퓨터가 이를 최종 집계한다. 사진 속 은하의 모양을 보고 종류를 판별하는 일은 여전히 컴퓨터가 해내지 못하는 인간만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온라인 서점으로 널리 알려진 ‘아마존’은 ‘인간 컴퓨터’ 분야에서 앞서 나가는 기업이다. 아마존은 일찍이 독자의 서평을 컴퓨터가 분류, 독자에게 책을 추천하는 서비스로 차별화를 이뤘다. 아마존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광범위한 네티즌을 규합해 고객의 업무를 대행하는 아웃소싱 사업을 하고 있다. 서비스 이름인 엠터크(https://www.mturk.com)는 아마존이 추구하는 사업모델이 뭔지 암시한다. 터크(Turk)는 18세기에 개발된 체스기계로, 내로라하는 고수들도 터크 앞에 무릎을 꿇으며 유럽에서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훗날 터크의 비밀이 밝혀졌는데, 사실 이 기계 속에는 체스의 고수가 들어가 있었다. 이처럼 겉모습은 기계 또는 컴퓨터지만 실제로 일하는 것은 사람인 서비스가 엠터크의 사업모델이다.

아마존 엠터크를 통해서 할 수 있는 업무가 많아지자 이제는 아예 엠터크에 의존한 새로운 사업체도 나오고 있다. 캐스팅워즈(http://castingwords.com)는 녹취록을 만들어주는 회사다. 방송내용을 쉽게 검색하도록 방송 녹취록을 만들던 것에서 시작한 이 사업은 이제 다양한 고객을 상대로 녹취록 제작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이들은 분당 1~2.5달러의 비용을 책정하고, 고객의 녹음자료를 5분 단위로 나누어 작업자에게 건네준다. 작업을 하는 얼굴 없는 작업자들은 모두 아마존 엠터크를 통해 모집한 ‘인간 컴퓨터’들이다. 이 회사는 조만간 비디오에 자막을 넣는 사업까지 확대할 준비를 하고 있다.

이제 ‘인간 컴퓨터’ 사업은 단순하고 반복적인 업무를 넘어서 복잡한 기사 작성에도 도전하고 있다. 카네기멜론대 교수들이 운영하는 크라우드포지(http://smus.com/crowdforge) 프로그램은 백과사전에
기계가 지배하는 매트릭스 세계에도 인간만의 영역이 있다
들어갈 기사를 작성하는 실험을 했다. 기사의 주제가 정해지면 1단계로 주제를 여러 개의 세부 항목으로 나누고, 2단계로 엠터크를 통해 모집한 ‘인간 컴퓨터’들이 기사를 작성한다. 3단계에서는 컴퓨터가 기사를 모아 전체 기사를 가공하는 통합 작업을 진행한다. 이렇게 작성한 기사를 온라인 백과사전 위키피디아의 기사와 비교했더니 품질이 비슷했다.

놀라운 일은 단일 작업자에게 맡겼을 때보다 여러 사람이 나눠 만든 기사의 품질이 더 우수했고, 비용은 더 저렴했다. 상호 견제와 피드백을 통해 품질이 안정되자 ‘인간 컴퓨터’를 통한 작업의 영역은 더 넓어지고 있다.

우리는 가끔 우유팩에 실린 실종 아동 사진을 보고 미아를 찾아준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다. 시간이 흘러 얼굴이 변해버린 아이를 어릴 적 사진과 비교해 부모를 찾아주는 일은 컴퓨터가 할 수 없다. 꼭 사람에게 의존해야만 하는 이 일에서 ‘인간 컴퓨터’가 한몫 한다. 실제로 아이폰에 실종 아동 찾기 애플리케이션을 담아 다니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자발적으로 실종 아동의 정보를 읽고 주변을 둘러보며 부모 잃은 아이들을 찾아낸다. 인간 컴퓨터가 있는 세상은 매트릭스가 그리는 것처럼 암울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인간과 컴퓨터가 공존하는, 더 따뜻한 세상을 기대해본다.

김용성 <세계경영연구원(IGM)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