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9월2일, 서울 통의동 대림미술관 앞. 전시회에 관람객들이 몰려들었다. 관람객 상당수는 독특한 줄무늬 옷을 입고 있었다. 들고 있는 가방에도, 신발에도 줄무늬가 들어가 있었다. 이 행사는 영국 패션업체 폴 스미스의 폴 스미스 최고경영자(CEO·66) 관련 전시회였다. 전시회 명칭은 ‘인사이드 폴 스미스-그의 예술, 그의 사진, 그의 세계 전(展)’. 스미스 팬들이 그가 디자인한 특유의 멀티 스트라이프 무늬 옷을 입고, 가방을 들고, 신발을 신고 전시회를 보러 온 것이다. 절반 이상은 미술·패션·디자인 전공자들이었다.

영국의 시골마을에서 옷가게 점원으로 시작해 세계적 패션그룹을 일군 스미스의 창의성과 열정이 한국의 팬들을 끌어모은 것이다.
"세상만물이 창의력 원천… 박지성도 내가 디자인한 옷 입고 맨유 그라운드 누볐죠"
○패션잡지를 보지 않는 디자이너

폴 스미스는 노팅엄에 자신의 이름을 딴 가게를 연 지 40여년 만에 세계 72개국에 400여개 매장을 갖춘 글로벌 패션기업으로 성장했다. 이 회사의 창업자이자 CEO인 스미스는 66세의 나이에도 수석 디자이너란 직함을 갖고 있다. 창작에 대한 열정 때문이다. 그의 디자인은 우리에게도 익숙하다. 최근까지 박지성 선수는 스미스가 디자인한 운동복을 입고 그라운드를 누볐다. 스미스가 2008년부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의상과 액세서리 디자인을 맡은 것. BMW 미니쿠페와 프랑스 에비앙 생수도 폴 스미스의 상징인 멀티 스트라이프를 입었다. 국내에 1200병의 폴스미스 에비앙 생수가 수입됐을 때는 단숨에 동이 나기도 했다.

스미스가 창조적 영감을 얻는 방식은 독특하다. 그는 패션잡지를 보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다른 사람들이 뭘 하고 있는가 하는 것으로 내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싶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그는 패션잡지를 보는 대신 사물을 관찰하고, 거기서 영감을 얻는다. “스미스가 자신만의 패션, 패션을 넘어 디자인, 디자인을 넘어 예술로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 비결이기도 하다. 그에게는 세상이 곧 작업실이기도 하다. 그는 한 행사에서 “의식적으로 어딘가에 자리를 잡고 일하지 않는다. 언제 어디서나 내 작업은 진행되고 있다”고 말했다.

대림미술관에서 열린 전시회 때도 그의 스타일이 그대로 드러났다. 스미스가 직접 찍은 1000여장의 사진과 그에게 영감을 준 수집품들이 전시됐다. 이름 없는 작가들부터 앤디 워홀, 데이비드 호크니 같은 현대미술 거장들의 작품까지 어우러져 있었다.

전시회의 하이라이트는 런던의 작업실을 그대로 재현한 공간이었다. 장난감과 골동품, 사진, 책 등 수많은 물건들이 선반과 탁자, 의자, 바닥에 어지럽게 쌓여 있었다. 그는 자신의 작업실에 대해 “어떤 이에게는 동화 속 나라처럼 멋진 곳이고, 또 다른 이에겐 악몽과도 같은 곳일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거대한 (아이디어의) 저장고”라고 말했다.

세계적인 디자이너이자 영국 패션의 아이콘이 된 폴 스미스가 갖고 있는 창의력의 원천은 세상 만물이라는 얘기다. 순간순간 머리를 스치는 아이디어를 적어놓은 종이쪽지가 그의 주머니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이런 까닭에서다.

○패션에 담긴 유머와 위트

그는 이렇게 얻은 아이디어를 기반으로 사업영역을 확장해왔다. 남성복 성공을 기반으로 여성복 등 의류뿐 아니라 액세서리, 신발, 향수, 시계, 가구 등의 사업에 진출했다. 간결하면서도 개성을 살린 디자인은 영국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그는 다른 사업에 진출할 때마다 “또 하나의 도전”이라고 말했다.

이런 도전이 세계 곳곳에 스미스의 팬을 만들어냈다.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와 롤링 스톤스의 믹 재거 등 유명인사는 물론 세계 수많은 젊은 건축가와 예술가들이 그의 팬이다.

폴 스미스가 보수적인 영국 패션업계에서 성공한 비결은 ‘유머와 위트’가 담긴 디자인이다. 겉보기엔 전통적인 스타일의 단정한 슈트지만 안감은 화려하거나 재미있는 무늬가 그려져 있는 것이 한 예다. 또 단춧구멍을 보라색으로 만들거나 각기 다른 색깔의 단추를 달아 개성을 살리기도 한다. 이런 디자인은 영국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전통과 유머를 사랑하는 영국인들의 코드를 파고든 전략이 성공한 셈이다.

그래서 폴 스미스의 디자인은 ‘미스터 빈을 만난 새빌로’로 불린다. ‘새빌로 스타일(Savile row style)’은 영국의 전통적인 슈트를 말한다. 영국의 유서 깊은 고급 양복점들이 런던 새빌로 거리에 모여 있어 유래한 말이다. 미스터 빈은 영국의 유명 코미디언이다. 장인정신도 성공 비결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스미스는 “옛날처럼 수공예로 하진 않지만 단추 구멍처럼 작은 디테일까지도 신경쓰는 영국 특유의 장인정신을 중요시한다”고 강조했다.

○“검소하고, 겸손하게”

CEO로서 스미스는 직원들에게 항상 ‘검소’와 ‘겸손’을 강조한다. 화려한 패션업계에서 보기 드문 경영철학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평가다. 이 덕분에 폴 스미스는 경기침체기에 큰 타격을 받지 않았다. 무리하게 대출을 받아 사업을 확장하지 않았고, 비용 절감에 힘썼기 때문이다. 그는 “많은 기업들이 경기가 나빠지면 감원하고, 출장을 줄이는 등 지출을 삭감하지만 폴 스미스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며 “평소에 항상 검소하게 운영해왔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경영철학은 맨손으로 세계적인 패션 브랜드를 일궈낸 그의 인생 경험에서 비롯됐다. 스미스는 15세에 가정형편 때문에 학교를 중퇴했다. 이후 재단사였던 아버지의 권유로 옷가게 점원으로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그의 꿈은 사이클 선수였다. 그러나 자전거를 타다 사고를 당했다. 사이클 선수의 꿈이 부서지는 순간이었다. 6개월간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나온 그는 패션과 디자인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퇴원 후 옷가게에서 부지런히 돈을 모아 1970년 자신의 옷가게를 열었다. 그러나 가게를 운영할 자금이 부족해 금요일과 토요일에만 영업할 수 있었다. 남는 시간에는 전문학교에서 패션 디자인을 공부했다. 공부를 통해 실력을 쌓으면서 자신이 디자인한 옷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1979년 런던으로 가게를 옮긴 뒤 자신만의 독특한 패션 스타일을 구축하며 명성을 쌓았다.

그는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지만, 덕분에 더 많은 경험을 쌓은 것이 기업을 이끄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말한다. “물건 나르기, 영수증 발급, 공장 관리 등 많은 일을 해봤다. 만약 대학에 가 디자인을 전공했다면 디자인만 알았을 것”이라는 얘기다.

전설리 기자 slj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