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전쟁…패스트푸드…'나쁜 것들'이 만든 현대문명의 실상
정크푸드의 대명사 스팸, 눌어붙지 않는 테팔 프라이팬, 먹다 남은 음식을 데울 때 쓰는 전자레인지…. 전혀 다른 범주의 이들 제품을 관통하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전쟁과 군사기술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스팸은 전장의 병사들에게 필요한 열량을 공급하는 전투식량이었다. 테팔 프라이팬은 원자폭탄을 만들었던 맨해튼 프로젝트의 부산물인 테프론을 프라이팬에 입힌 것이다. 전자레인지는 적 전투기의 움직임을 미리 잡아내는 레이더 기술이 가정용으로 쓰임새가 확장된 경우다.

《섹스, 폭탄 그리고 햄버거》(피터 노왁 지음, 문학동네)는 일상의 사물들에서 현대 기술문명의 발전 동력을 살핀 책이다. 비교적 널리 알려진 사실들을 직조해 기술문명의 모습과 그 뿌리를 재구성한 솜씨가 탁월하다.

저자는 “세상이 전쟁, 섹스, 음식에 대한 인간의 기본 욕망에 의해 형성됐다”며 “현대 기술문명의 자산은 무엇보다 전쟁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전쟁의 필요에서 개발된 기술들이 시장에 나와 산업화되면서 현재가 만들어졌다는 것. 섹스와 패스트푸드 또한 전쟁과 모종의 관계를 맺으면서 현대 기술문명을 주도하는 축을 이뤘다는 설명이다.

군(軍)은 거대한 기술 창조자이면서 장기적인 얼리어답터라고 할 수 있다. 막대한 비용 때문에 민간에서 하기 어려운 연구를 수행하며 기술을 발전시켰다. 늘 쓰고 먹는 가전제품이며 식품에도 군사기술이 들어가 있다. “비닐봉지부터 헤어스프레이, 비타민, 집적회로, 구글어스까지 오늘날 아무 생각없이 쓰는 대부분의 현대 기술은 군사비를 쏟아부어 개발한 것”이라는 말이다. 인스턴트 커피는 전쟁 기간 중 군에 납품한 분유를 만든 분무건조기술로 태어났으며, 맥도날드 매장 주방에도 잠수함 주방 설계기술이 들어가 있을 정도다.

포르노그래피 기술도 그렇다. 포르노 업체들은 소형 필름카메라, VCR에 쓰이는 자기녹음, DVD의 레이저 등 군에서 개발한 통신기술과 수단에 발빠르게 편승했다. 더 좋은 기술을 개발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대는 데에도 과감했다.

인터넷을 활성화시킨 것도 포르노 산업이다. 플레이보이지는 1994년 미국 대기업으로는 거의 처음으로 웹사이트를 만들어 사람들을 인터넷에 몰려들게 했다. 2009년 미국 전체 검색어의 25%가 성인 콘텐츠였고, 전체 웹사이트의 3분의 1이 포르노 사이트였다고 한다.

저자는 “전쟁, 포르노, 음식은 보편적인 현상으로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며 “우리가 속한 세상과 삶을 이런저런 모습으로 빚어나갈 것”이라고 말한다.

김재일 기자 kji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