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호 씨 "삭막한 현실 삭혀 줄 그리움을 노래했죠"
‘바람은/강을 거슬러 올라/나무들의 어깨에/기대어 잠이 들고/눈을 감으면/언 땅에서 풀려나는/시냇물 소리//…//그대 걸음, 걸음마다/꽃씨들은 눈부신 껍질을 벗는데/하얀 발목 빛내면서/잠든 아가의 숨소리처럼/내게 다가오는 이/그대, 누구신가’(‘봄날’ 중)

시인 김경호 씨(사진)가 등단 후 35년 만에 첫 시집 《봄날》(두엄)을 냈다. 김씨는 1977년 영남일보, 1980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돼 문단에 나왔다. 대구상고를 졸업하고 1978년 서울은행에 들어가 지난해 하나은행에서 퇴직할 때까지 평생을 은행원으로 살았다.

‘청년 시인’이었던 그가 귀밑머리 희끗해진 지금에서야 내놓은 첫 시집은 그의 삶을 기록한 일기와도 같다. 1970년대부터 최근까지 쓴 시편들이 역순으로 묶였다. 1부는 최근작, 2부는 1990년대 이후, 3부는 1980~1990년대, 4부는 1970년대에 쓰인 시들이다.

김씨는 자서에 “짧지 않은 세월을 무엇에 쫓기며 살았는지 이제야 옷 한 벌 지으려 드니 내딛는 걸음이 가볍지만은 않다”고 썼다.

‘비오는 날’ ‘풀잎연가’ 등 초기 시에서는 서정적인 정서가 물씬 풍긴다. 은행원의 일상을 노래한 자화상 같은 시도 있다.

‘오늘도 하늘은 여전히 흐리고/아라비아 숫자에 갇혀/자욱한 미결의 먼지들만/책상 위에 쌓이고/우리는 결리는 옆구리에/저마다 붉은 소거(消去)키를 꽂고/낯익은 골목길로 흩어지는데’(‘생활’ 중)

최근 시들의 주된 정서는 그리움이다. 때론 상처를 토로하지만 그 자리에 서서 내일을 그린다. ‘살아 갈수록/상처에 손이 간다//손톱이 자라는 동안/왜 손금이 가려운지/새벽녘에 들어 보는/늙은 레코드처럼/내 몸은 지지직거리는/유한반복의 날들//…//살아 갈수록/상처가 가렵다/낫지 않은 깨진 상처 위에/푸른 별이 돋는다.’(‘몸’ 중)

정윤천 시인은 시집 해설을 통해 “김경호 시인의 시편들 대부분에는 화려한 수사나 과도한 장치가 없어 읽기에 편안하다는 미덕을 지니고 있다”며 “어렵게 건너온 그의 시와 반생의 역정이 남은 날의 고투를 통해 더욱 광휘롭기를 바란다”고 했다.

양준영 기자 tetriu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