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프리즘] 성장주, 가치주, 개념주
아메리카온라인, 월드컴, 글로벌크로싱, 버티컬넷…. 많은 이들의 기억으로부터 지워진 이름들이다. 10여년 전엔 정반대였다. 증권시장을 뜨겁게 달궜던 ‘닷컴’의 대명사들이었다.

닷컴 열풍이 월가에 상륙한 건 1998년 10월. 2001년 초 거품 붕괴가 시작되기까지 치세(治世)는 2년 남짓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자취는 대단하다. 2000년 3월10일 5048.62까지 치솟았던 나스닥 지수는 2002년 10월9일 1114.11로까지 고꾸라졌다. 반의 반토막도 안되는 수준이다. 애플 구글 등 초우량 IT주식들의 대약진 덕분에 최근 올라섰다는 게 ‘11년여 만의 3000선 회복’이다. 거품 후유증이 그만큼 크고, 지긋지긋할 정도로 길다.

‘개념’의 포로가 됐던 바보들

유쾌할 리 없는 얘기를 꺼내는 데는 이유가 있다. 닷컴주의 명멸만큼이나 반짝 등장했다가 사라진 월가 용어, ‘개념주(concept stock) 소동’의 교훈을 되새기기 위해서다.

증시의 유망주식을 구분하는 용어는 성장주(growth stock)와 가치주(value stock)뿐이었다. 닷컴주식들은 이 가운데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았다. 이렇다 할 실적도, 투자가치도 검증되지 않은 미증유의 뉴비즈니스 기업들이 ‘뭔가’ 큰 대박을 터뜨릴 것이라는 맹신 아래 ‘묻지마 투자’가 몰려들었다. 기업 간 전자상거래(B2B)업체였던 버티컬넷이 그 전형을 보여줬다. 이 회사는 거품이 절정을 치달았던 2000년 2월, 주식 시가총액(70억1000만달러)이 전년 매출의 326배에 달했다. 미국 증시 상장기업 평균(2배)의 160배를 넘었다.

문제를 키운 건 월가 증권회사들이었다. 수익성이 검증되지도, 보장되지도 않은 주식에 몰려드는 투자자들에게 해괴한 지표를 들이대며 투기를 부추겼다. 이익구조가 없는 닷컴주식들을 위해 주가수익비율(PER) 대신 ‘주가매출비율(PSR)’이란 것을 만들어냈다. 거품주식에 ‘개념주’라는 그럴싸한 이름을 붙여 투자자들을 현혹시킨 것도 월가 전문가들이었다.

‘개념주 소동’을 떠올리는 건 요즘 정치판 때문이다. ‘민부국강(民富國强)’을 실현하기 위한 방법론을 치열하게 고민하기보다는, 여론의 불평불만을 부추겨 그 등에 올라타려는 정치 프레임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지속가능한 국가를 이루기 위한 성장담론은 뒷전으로 밀려난 지 오래다.

‘개념 정치’ 부추기는 ‘멘토’들

서민에게 희망, 시민에게 자유, 국민이 주인되는 나라 등 거창한 구호 아니면 재벌 독점 해체, 외국자본 투기금지같이 철 지난 레코드를 틀며 대립과 증오감정을 부추기는 공약이 난무한다. 국민을 상위 1%와 나머지 99%로 편가르고, 정강정책이 판이한 정당 간에 후보를 단일화하며 선거연대에 나선 야권은 그 절정을 보여준다.

그럴듯해 보이는 거대담론으로 뭉치다 보니, 정작 그들이 보호하겠다고 자임하는 서민과 중산층의 일자리와 소득을 어떻게 늘리고 삶의 질을 개선하겠다는 건지 설득력 있는 답을 찾기 어렵다.

이런 판에 ‘양심적 지식인’을 자처하는 이들은 ‘개념 정치 부추기기’에 신명을 내고 있다. ‘야권연대 멘토단’ 참여사실을 트위터를 통해 알리면서 “상식, 양심, 인간, 생명, 그리고 99% 연대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레토릭을 날린 어느 소설가도 그런 경우다. 유권자들의 냉철한 판단을 흐리게 하는 화려한 언어와 개념의 유희는 실적과 수익성이 검증되지 않은 ‘개념주’ 돌풍을 부추겼던 월가 전문가들과 다를 게 없다. 거품 붕괴 이후가 두렵다.

이학영 편집국 부국장 ha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