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경제전문지 포천은 매년 미국 내 500대 기업을 골라 ‘포천 500’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한다. 1955년부터 발표된 포천 500은 미국 내 산업 판도 변화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지표로 꼽힌다. 그런데 정보기술(IT) 분야에서 선두 업체는 좀처럼 바뀌지 않고 있다. IBM과 HP다. 양사는 지난 각각 1955년과 1962년 포천 500에 등장한 이후 계속해서 업계 선두권을 유지하고 있다. 지난해 5월 발표된 2011년 순위에서도 IBM은 18위, HP는 11위(매출 기준)를 차지했다.

두 기업의 역사는 IT 산업의 역사 자체로 인정받고 있다. 1911년 창립된 IBM은 최초의 IT 전문 기업으로 꼽힌다. IBM은 종이 카드에 구멍을 뚫어 정보를 기입한 뒤, 이를 인식·연산하는 천공카드 기기(태뷸레이팅 머신)에 집중해 해당 분야의 1위 업체 자리에 올랐다. 1938년 허름한 차고에서 시작한 HP는 실리콘밸리 벤처기업의 모태나 다름없는 기업이다.

○40세 물먹은 세일즈맨의 질주

IBM의 실질적인 창업자로 꼽히는 토머스 왓슨의 삶은 1914년 정밀기기 제조업체 CTR의 총지배인에 임명될 때까지만 해도 실패의 연속이었다. 미주리주의 벌목꾼 아들로 태어난 그는 “아버지처럼 살 수는 없다”는 생각에 상업학교를 졸업해 세일즈맨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실적은 보잘 것 없었다.

하지만 20세에 금전등록기업체 NCR에 취직하면서 그의 인생은 180도 바뀌게 된다. NCR의 창업자인 존 패터슨은 외판원 제도, 성과급, 장려금, 할부 판매 등 갖가지 영업 방식을 개발한 기업가였다. NCR의 기법을 몸에 익힌 그는 27세에 지점장 자리까지 오른다. 하지만 위장 업체를 세워 중고 금전등록기를 매매하던 소상공인을 망하게 한 행위가 적발되면서 재판정에 서게 되고 설상가상으로 패터슨에게까지 버림받아 회사를 떠나게 된다.

1년간 무직으로 전전하던 그는 CTR 총지배인으로 옮긴다. CTR은 모험 기업가인 찰스 플린트가 소유한 시간 계측기, 상업용 저울, 천공카드 기기 업체 3곳을 합병한 회사였다. 왓슨이 처음부터 정보 처리 산업이 급성장할 것으로 예측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미국에서 성장하고 있던 대기업들이 회계 등을 위해 천공카드 기기를 구입하는 수요가 늘자 비즈니스 기회를 재빨리 포착했다. 왓슨은 1920년대 초 저울 부문을 매각하고 사명을 IBM으로 바꾸면서 천공카드 기기 전문업체로 회사를 바꾼다. IBM은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전까지 미국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회사가 됐다. 비결은 ‘서비스’와 ‘공격적인 투자’였다.

○전설이 된 팩커드의 차고

1937년 8월 제너럴일렉트릭(GE)에서 엔지니어로 일하던 데이비드 팩커드는 회사를 휴직하고 모교인 스탠퍼드대가 있던 캘리포니아주 팰러앨토에 왔다. MIT에서 전기공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은 대학 동기 빌 휴렛과 함께 회사를 세우기 위해서였다. 이듬해 두 사람은 팩커드의 집 차고에 세운 회사에서 음향발진기(오실레이터)를 첫 제품으로 생산한다. 시제품도 없었던 상태에서 ‘200A’라는 명칭만 붙여 내놓은 이 제품은 저렴하면서도 성능이 좋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날개돋친듯 팔려 나갔다.

2차 세계대전에 뒤이은 TV 붐은 HP가 비약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됐다. 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은 근접신관·레이더·장거리 무전기 등 전기 기술을 이용한 무기를 광범위하게 사용했다. 팩커드는 군의 까다로운 주문 사항을 신속하게 처리하면서 매출을 빠르게 늘려 나갔다. 레이더 개발용 장비를 납품하면서 무선통신 관련 기기까지 사업 영역을 넓혔다. 스탠퍼드대와 끈끈한 인연을 맺고 기술 개발 및 인력 채용에서 지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강력한 이점이었다.

HP는 1957년 기업 공개를 계기로 사업 구조를 일신한다. 팩커드는 경영 전반을 총괄하고 휴렛은 연구 개발을 관장했다. ‘HP웨이’라고 알려진 독특한 기업 문화를 정립한 것도 이 시기다.


○컴퓨터 시장에서 맞붙다

HP는 원래 컴퓨터 시장에 진출할 의향이 없었다. 팩커드는 “급속도로 변화하는 전자산업 혁명에 의해 컴퓨터 산업으로 떠밀려 들어갔다”고 말했다. 하지만 현재 HP는 기업용 컴퓨터 시장에서 IBM과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으며, PC 시장에서는 1위 업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1950~70년대 컴퓨터 업계는 ‘IBM과 일곱 난쟁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IBM이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1964년 출시된 범용 대형 컴퓨터(메인프레임) ‘시스템 360’은 지금까지 유지되는 컴퓨터의 기본 개념을 정립한 제품으로 평가된다. 1956년 설립된 컴퓨터 사업부는 HP라는 이름 대신 ‘다이맥’이라는 별도의 회사명을 썼다. 1964년 HP는 정밀계측장비의 제어용 기기로 ‘모델2116’을 내놓았다. 이 장치는 ‘사실상’ 컴퓨터였으며 미국 내 대학과 연구소는 모델2116만 따로 구매해 컴퓨터로 사용하곤 했다. 결국 1972년 HP는 ‘HP3000’이라는 모델명으로 기업용 컴퓨터 시장에 본격 진출한다. HP는 IBM이 상대적으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던 중소형 컴퓨터와 워크스테이션 시장을 중심으로 세를 확장했다. 그리고 칼리 피오리나가 이끌고 있던 2002년, HP는 컴팩을 인수하면서 세계 최대 PC 제조업체 자리에 오른다.

1977년 애플의 등장으로 본격화된 PC 시장은 컴퓨터 업계의 판도를 뒤흔드는 계기가 됐다. 스티브 잡스가 내놓은 애플2는 이용자 편의성이 높을 뿐 아니라 다양한 응용 소프트웨어를 쓸 수 있어 급속도로 퍼져 나갔다. 위협을 느낀 IBM은 연구 개발에 착수한 지 1년 만에 처음으로 ‘퍼스널 컴퓨터’라는 이름이 붙은 ‘모델 5150’을 내놓았다. 중앙처리장치(CPU)는 인텔, 운영체제(OS)는 마이크로소프트로부터 공급받았다. 5150이 큰 성공을 거두자 컴팩을 시작으로 IBM PC를 복제한 제품을 생산하는 PC 업체들이 잇따라 등장했다. IBM도 자사 제품의 확산을 위해 이를 방관했다.

문제는 여기에 있었다. PC는 급속도로 범용화됐다. IBM 클론을 만드는 다른 업체들은 인텔 등 다른 업체로부터 핵심 부품을 그대로 조달받았다. 이들 업체는 낮은 조립 원가와 공급망관리(SCM) 기술을 앞세워 IBM의 시장을 잠식해 나갔다. 결국 IBM은 2003년 PC 사업부를 중국 레노버에 매각하는 결정을 내렸다.

○끊임없는 변신

IBM은 2차 세계대전 이후 기업용 컴퓨터 분야가 성장하면서 위기를 맞았다. 천공카드 기기를 만들던 기계 전문가들이 최신 전자공학이 응축된 컴퓨터를 만들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결국 왓슨의 후계자였던 아들 토머스 왓슨 주니어가 나서서 전자공학 전문가들을 대거 끌어모아 연구소를 일신했다. 이때 늘어난 직원들이 약 2만명에 달한다. 이들은 ‘방위계산기’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범용 컴퓨터 ‘IBM 701’을 1952년 출시했다. 701 모델은 설치와 유지 관리가 간편한 범용 컴퓨터로 경쟁 제품들을 압도했다. 이후 루 거스너, 샘 팔미사노 등 전임 경영자들도 과감한 구조조정과 투자로 IBM의 변신을 이끌어 나갔다.

HP도 주력 사업을 끊임없이 바꿨다. 팩커드와 휴렛의 소규모 공방은 간단한 음향발진기에서 극초단파 무선장비, 의료기기, 화학 산업용 분석기, 기업용 컴퓨터, 프린터, IT서비스로 사업 영역을 넓혀 나갔다. 직원들의 창의성을 북돋는 문화가 변신의 원동력이었다.

IBM에서 왓슨이 물러난 것은 1956년 5월이었다. 왓슨은 그 다음달 8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장남인 왓슨 주니어는 1971년까지 최고경영자(CEO) 자리를 지켰다. 왓슨 부자가 IBM을 60년간 통치한 셈이다. 팩커드가 1968년 닉슨 행정부의 국방부 차관으로 임명되면서 휴렛에게 CEO 자리를 넘겼다. 1972년부터 1993년까지 이사회 의장으로 일하면서 교육 및 자선 사업에 힘썼다. 1996년 사망했을 때 40억달러 상당의 재산을 팩커드 재단에 남겼다. 두 사람은 갔지만 그들이 세운 기업은 지금도 IT의 최첨단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조귀동 기자 claymor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