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하이닉스를 인수한 뒤로는 꿈도 반도체 꿈을 꿉니다.”(3월26일 SK하이닉스 직원들과의 ‘해피토크'에서)

최태원 SK 회장에게 SK하이닉스 인수는 ‘꿈’이다. 30여년 전 야심차게 선경반도체를 세웠지만 오일쇼크로 접었던 선친(고 최종현 SK 회장)의 오랜 ‘꿈’을 이뤄냈고, 지난해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반드시 인수하겠다”던 본인의 ‘꿈’도 달성했다. SK그룹의 글로벌 도약을 꿈꾸게 하는 것도 SK하이닉스다.

SK하이닉스 직원들도 꿈을 꾸기 시작했다. SK하이닉스는 지난 3월 ‘미래전략실’을 발족했다. 신사업, 중·장기 비전 등을 연구하는 곳이다. 2001년 채권단 공동관리에 들어간 뒤 하루하루가 살얼음판 같았던 옛 하이닉스반도체에 지난 11년 동안은 ‘미래'를 꿈꾼다는 게 사치였다. 그런 그들이 이제 당당히 ‘미래’를 얘기하고 신사업을 꿈꾸고 있다. 과거 늘 매각 대상이었던 SK하이닉스가 숙적 엘피다 인수를 추진하는 것 역시 옛 기준으로는 ‘꿈만 같은 이야기’이다.


○‘종합반도체 회사’를 꿈꾼다

지난해 4월 하이닉스반도체 시절, 이 회사는 낸드플래시 메모리 반도체에 대한 추가 투자를 결정했다. 급팽창하는 시장을 잡기 위한 선제적 결정이었다. 시일을 다투는 문제였지만, 수조원에 달하는 투자액을 놓고 채권단은 승인을 늦췄다. 그러다 메모리 D램 값이 급락하자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3분기부터 적자가 발생하면서 투자가 유보됐기 때문이다.

SK하이닉스는 올 들어 급격히 커진 낸드 시장에서 소외돼 분루를 삼키고 있다. 2008~2009년 낸드 시장점유율 3위였던 SK하이닉스는 마이크론에 밀려 4위로 처졌다.

SK하이닉스 관계자는 “지난해 4~5월께 당초 계획대로 낸드 투자가 이뤄졌다면 올 1분기에도 흑자를 낼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제는 사정이 달라지고 있다. SK하이닉스는 올해 작년보다 20% 늘어난 4조2000억원을 투자하기로 하고, 이 가운데 55%를 낸드에 투입하고 있다. 연간 13만장(300㎜ 웨이퍼 기준) 수준인 낸드 생산량이 내년부터는 연 17만장가량으로 늘어난다. 투자 확대도 검토하고 있다. SK텔레콤이 인수와 함께 2조3426억원을 증자, 투자여력이 생긴 덕분이다. 세계 3위 D램업체인 일본 엘피다 인수전에도 뛰어들었다. 김정수 SK하이닉스 상무는 “몇 년 전에는 꿈도 못 꾸던 일”이라고 했다.

SK하이닉스는 메모리를 넘어 종합반도체회사로 보폭을 넓히고 있다. 스마트 기기 확산에 발맞춰 40% 수준인 모바일 D램과 낸드 등 ‘모바일 솔루션’ 비중을 2016년 70%까지 끌어올릴 계획이다. 비메모리 반도체 투자도 추진하고 있다. 그동안 꿈도 못 꿨던 수십조원이 투입될 대형 프로젝트다.

○‘승부수’ 던진 최 회장

SK하이닉스가 과감한 투자에 나서고 있는 것은 최 회장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최 회장의 반도체를 향한 집념은 하이닉스 인수 과정에서 여러 차례 입증됐다. 지난해 11월 하이닉스 본입찰을 사흘 앞두고 검찰의 압수 수색과 같은 악재가 터졌을 때도 흔들리지 않고 밀어붙였다. 지난달 26일 SK하이닉스 출범식을 치르고는 경기 이천공장에서 하룻밤을 보내면서 임직원들과 호흡을 함께했다.

엘피다 인수전에 뛰어든 것도 최 회장의 승부수다. SK 관계자는 “최 회장이 지난 2년 동안 반도체산업을 꾸준히 공부하면서 단순히 하이닉스 인수로 끝나지 않는 더 큰 그림을 그려왔다”고 전했다.

지난달 SK하이닉스 대표이사도 맡게 된 최 회장은 SK하이닉스 출범식에서 “앞으로 SK는 책임감을 갖고 반도체사업에 투자하면서 더 크게 하이닉스를 키울 것”이라며 “이를 위해 나부터 어떤 역할이든 마다하지 않고 직접 뛰겠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SK이노베이션과 SK텔레콤 이상으로 도약하는 SK하이닉스를 꿈꿀 것”이라며 “세계 1류 반도체 기업으로 거듭나서 국가 경제와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행복을 나누는 SK하이닉스를 만들어 가겠다”고 다짐했다.

하이닉스가 SK 품에 안긴 뒤 주변 환경도 긍정적으로 바뀌고 있다. 치킨게임을 벌이던 엘피다가 지난달 파산을 신청했고, 작년 12월 사상 최저치로 추락했던 D램 값은 두 달 동안 17% 올랐다.

○SK 사업구조의 대개편

SK그룹에 있어 하이닉수 인수는 단순한 인수·합병(M&A)이 아니다. 에너지와 통신 양대 축으로 운영되던 SK의 기존 사업구조에 반도체가 추가되면서 대대적인 사업 포트폴리오 재편이 일어나게 됐다.

SK는 1980년 대한석유공사(현 SK이노베이션), 1994년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을 각각 인수하면서 이 두 분야를 성장축으로 삼아왔다. 주력 계열사인 SK텔레콤과 SK이노베이션이 매년 조 단위의 영업이익을 올리고 있지만, 내수 중심인데다 통신요금·기름값 인하 압박과 같은 정부 규제가 강화되고 있는 점도 부담으로 작용해 왔다. 이 때문에 SK는 끊임없이 새로운 글로벌 성장축을 찾아왔다.

최 회장은 “SK그룹이 국내에서는 경쟁사와의 경쟁력 차이가 줄어들고 있으며, 해외에서는 신흥경쟁국 부상과 기술융합화 트렌드로 도전을 맞고 있다”며 “이 같은 국내외 장벽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기술 중심의 성장전략 등 새로운 변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해왔다. 이 같은 상황에서 ‘기술’과 ‘글로벌’이라는 핵심 요소를 두루 갖춘 SK하이닉스는 SK그룹 성장의 새 대안이 될 수 있다는 게 전반적인 평가다.

SK는 SK하이닉스를 통해 정보통신(ICT)산업의 핵심 트렌드로 자리잡은 ‘융합과 혁신’을 위한 사업 다각화를 이룬다는 전략이다. 또 중·장기적으로 ICT 서비스업과 반도체 제조업 간의 융합형 사업 모델도 적극 발굴할 방침이다.

전문가들은 “반도체라는 글로벌 비즈니스 플랫폼은 SK의 글로벌 위상을 재정립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김현석 기자 reali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