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승진자와 오찬 "채용서 여성 비중 꾸준히 늘리겠다" 약속
고졸 출신 첫 女차장에 "부장, 상무도 돼야…기억하겠다" 눈길
삼성 관계자 "개인사까지 얘기한 격의와 허물 없는 자리였다"

이건희 삼성 회장이 19일 여성 임직원들과 오찬을 갖고 일과 가정 생활을 병행하며 겪는 고충, 보람, 업무 성취에 따른 자부심 등을 귀기울여 들었다. 장녀인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도 자리를 함께 했다.

이 회장은 "여성에게는 모성애에서 비롯된 힘이 있다" 며 "앞으로도 채용에서 여성 인력을 더욱 늘리겠다"고 강조했다. 고졸 생산직으로 입사해 첫 여성 차장에 오른 한 직원에겐 "부장도 되고 상무도 되야 한다" 며 "내가 꼭 기억하겠다"고 말해 눈길을 끌었다.

이날 오찬에 배석한 삼성 한 고위 관계자는 "여성 인력의 중요성을 강조해온 이 회장은 관심있게 듣고 질문도 많이 했다" 며 "격의나 허물이 전혀 없었고, 개인생활의 사소한 부분까지 다 얘기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육아와 일 함께하라면 나부터 도망갈 것…여성 대단"

이날 오찬은 지난 연말 정기인사에서 승진한 여성 상무 3명, 부장 2명, 차장 3명, 과장 1명 등 9명이 참석했다.

한 상무는 "지난 해 회장님이 여성 임원과의 오찬에서 '사장까지 나와야 한다'는 얘기를 한 걸 보고 아들이 '엄마도 곧 임원이 되겠다'고 했다" 며 "실제 연말에 임원으로 승진해 아들의 격려를 받고 기분이 좋았다"고 말했다. 이 회장은 "참 든든하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차장 한 사람은 "37살에 결혼해 4년 만에 아이를 낳았다"며 "너무나 기다린 아이였지만 막상 낳고보니 일과 육아를 함께 하는게 너무 힘들었다"고 털어놨다.

워킹맘들의 고충을 들은 이 회장은 "회사 일과 가정 일을 다 하는 걸 보면 대단하다. 남자들에게 해보라고 하면 나부터 도망갈거다" 며 "여성들은 아이를 열 달 동안 뱃속에서 키우고 고통을 이기며 낳은 힘이 있다"고 칭찬했다. 이어 "현재 여성 인력의 비율이 30% 가량 되지만, 지속적으로 늘리겠다"고 강조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삼성전자 생산직 사원에 입사, 17년 만에 첫 여성 차장에 오른 직원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이 차장은 "지금 32나노 생산 관리 업무를 한다" 며 "생산직 여성들에게 학력의 벽이 없다는걸 보여줘서 기쁘다"고 밝혔다.

이 말은 들은 이 회장이 흐뭇한 표정으로 "빨리 부장도 되고, 상무도 돼야지" 하자 "안그래도 후배들이 빨리 임원이 돼서 자신들의 입장을 반영해 달라고 응원한다"고 답했다. 이 회장은 "내가 꼭 기억하고 있을께"라고 약속했다.

삼성 관계자는 "고졸로 들어와 뛰어난 업무 성과로 차장까지 승진했다는 것에 이 회장이 기뻐했다" 며 "학력 차별이 없는 문화가 자리잡았다는데 뿌듯함을 느낀 것 같다"고 전했다.

"우수한 후배에 삼성 입사 권해라…최소한 후회는 안해"

뛰어난 능력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안(?)한 여직원들의 솔직담백한 얘기도 이어졌다. 2년 발탁으로 차장에 승진한 한 여직원은 "결혼에서 속도위반을 해도 될까말까한 상황인데, 승진만 속도위반을 하면 어떻게 하냐는 칭찬 아닌 칭찬을 들었다" 며 "삼성전자 여성 차장이면 너무 무거워 선도 안들어온다고 하더라"고 걱정했다.

그러자 한 미혼 부장은 "차장이 그러면 난 어떻게 하냐"고 한탄했고, 또 다른 미혼 상무는 "나는 선 말고 그냥 알아서 구해야 겠다"고 말했다.

한 여성 차장은 소속 사업부의 무서운 사장에 대처하는 자신만의 비법을 털어놨다. "우리 사장은 너무 터프해서 남자 선배들도 어려워한다" 며 "하지만 나는 다 얘기한다. 여성은 부드러운 소통 능력, 유연성, 적응력이 뛰어난 것 같다"고 풀이했다.
이 회장이 "사장이 누구냐"고 묻자 "영상디스플레이사업부 '윤부근 사장'" 이라며 "개발팀장 시절에는 별명이 '불끈이'였는데, 요즘에는 많이 부드러워져 '푸근이'로 불린다"고 뒷수습을 했다.

참석자들의 얘기를 듣고 난 뒤 이 회장은 "회장이 되고 나서 여성인력을 늘리고, 보육시설도 많이 만들라고 강조했다. 이제는 인프라가 많이 갖춰졌다" 며 "우수한 후배들에게 삼성에 와서 일하라고 해라. 최소한 후회는 안할거다. 열심히 하고 정확히 보고 뛰면 잘 된다"고 격려했다.

이 회장은 지난해 서초 사옥으로 첫 출근한 날 직원 전용 '어린이집' 실태를 점검하고, 추가 설립을 지시한 바 있다. 우수한 여성인력이 육아 걱정없이 기량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다.

지난해 8월에는 여성 임원들과 오찬을 갖고 "여성은 유연하고 경쟁력이 뛰어나다" 며 "이들이 사장까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후 연말 정기 인사에서 삼성전자 최초 여성 부사장과 공채 출신 첫 여섬 임원이 나오는 등 여성이 대거 승진했다.

최근에는 지역전문가들과 함께 한 자리에서 "여성 지역전문가의 비중을 30%까지 늘리라"고 주문하는 등 여성 인력의 중요성을 꾸준히 강조해왔다.

한경닷컴 권민경 기자 k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