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삼판매 시찰하러 간 개성상인, 대만과 경제교류 '물꼬'를 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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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산책 - 한국고전번역원과 떠나는 지식여행
10일동안 대만 전역 돌면서 현대화된 원주민 삶 체험
목재 운송 철도에 깊은 인상
10일동안 대만 전역 돌면서 현대화된 원주민 삶 체험
목재 운송 철도에 깊은 인상
우리나라 근대는 다채롭다. 흔히들 한국 근대 하면 ‘국한문 근대’ 혹은 ‘일본어 근대’를 떠올리기 쉽지만 ‘한문 근대’도 엄연히 존재했다. 근대를 살아간 우리나라 사람들은 여전히, 새롭게 인간과 세계를 한문으로 기록했다. 우리가 경험한 ‘한문 근대’ 이야기 한 토막을 소개한다. 개성 상인이 1928년 해외 홍삼 판매 현황을 시찰하러 대만에 출장을 다녀온 이야기. 《향대기람(香臺紀覽)》의 ‘일기(日記)’다. 5월5일 기록부터 보자.
‘대북시는 대만의 서울로 총독부 및 주청(州廳), 기타 각 관아의 소재지다. 학교, 병원, 박물관, 도서관, 식물원 등 문화시설이 완비되어 있지 않음이 없다. 도로는 넓고 깨끗하고 건축은 화려하고 장엄하다. 쌀과 차를 거래하는 중심지이기 때문에 점포가 번창하고 상업이 융성하다. 담수가 관류하고 풍경이 수려하며 인구는 이십만이라 한다. (…)차를 몰아 약 40분이 지나 담수 항구에 이르렀다. 항구는 대북 시에서 13리 떨어져 있다. 이 항구는 일찍이 지나(支那)와 무역하는 중요한 항구였다. 수십 년 이래 조수가 점차 줄어들고 모래톱이 고르지 않아 20톤 이상 선박은 출입할 수 없다.’
엿새 뒤 시찰단은 대만 남부 항구도시 가오슝(高雄) 남산에 올라 시를 내려다본다.
‘주청의 소재지다. 인구 4만여명이고 쌀, 사탕, 철제품 등의 무역액이 1억8000만원이다. 남방의 유일한 양항(良港)으로 현재 비록 기륭(基隆)에 버금가지만 새롭게 일어나 발전할 희망이 있다. 만이 깊고 넓고 해안이 튼튼해서 8000톤급 거함 10여척이 능히 정박할 수 있다. 확장에 착수해서 공사가 완성되면 1만톤급 선박도 쉽게 출입할 수 있을 것이라 한다.’
오후에는 대남(臺南)으로 향해 정성공을 모시는 신사를 둘러본다.
‘신사는 정성공을 위해 설립된 것이다. 정성공은 명말(明末) 때 사람이다. 그 아버지가 무역 때문에 일본 규슈 나가사키에 건너가 일본 여자에게 장가 가서 정성공을 낳았다. 그 아버지는 다시 오지 않았고 어머니가 어린 아이를 데리고 명나라에 와서 살게 됐다. 명나라가 망할 때가 돼 명조의 자손을 이끌고 난을 피해 여기에 와서 먼저 살던 화란(和蘭) 사람과 서로 용납하지 못해 싸우다가 비로소 승리를 얻어 통치권을 장악하고 이 땅을 주재하고 동평왕(東平王)으로 추봉되었는데 이것이 약력이다.’
조선시대에 효종(재위 1649~1659)은 북벌의 비원을 이루지 못하고 서거한 임금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효종의 재위 기간 중국 대륙에서 실제 북벌이 시도되고 있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것 같다.
북벌의 주인공은 샤먼(厦門)의 해상 세력인 정성공. 그는 남명(南明) 영력제(永曆帝)의 신하로서 대군을 이끌고 양자강을 거슬러 올라가 남경(南京)을 공략했다. 이 작전은 실패했지만 그는 1661년 대만으로 건너가 네덜란드 세력을 격파했고 비록 그는 이듬해 급사했지만 정씨 일가는 23년간 대만을 지배했다.
조선 사회가 대만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이 무렵이다. 조선의 대만 인식은 동아시아 국제 질서의 변화에 따라 크게 숙종대, 정조대, 고종대, 이렇게 약 100년 주기로 세 단계의 변화가 있었다.
숙종대에는 정성공의 해상세력에 대한 사회적인 위기의식이 높았다. 정성공이 충청도에서 가까운 해도에 머무르고 있다는 소문, 정성공이 50척의 배에 병사 수만을 이끌고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서울을 공략할 것이라는 소문, 정성공이 한반도에서 새 왕국을 건설할 것이라는 소문이 대책 없이 떠돌았다.
정조대에는 청조 건륭제 치하의 대만에 대한 호기심이 높았다. 당시 조선 사절단은 중국의 궁궐에서 몽골 베트남 미얀마 등 중국 주변 각국 사절단을 볼 수 있었고 그 중에는 대만의 생번(生蕃)도 포함돼 있었다. 고종대에는 대만으로 뻗어가는 일본 세력의 확장에 대한 불안감이 높았다.
그러나 조선시대 사람들이 대만에 가야겠다는 명확한 목적의식을 안고 직접 방문해 대만의 전통과 현대를 체험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렇게 볼 때 20세기 전반 식민지 조선에서 《향대기람》이 출간된 것은 한·대만 교류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생각된다.
개성 상인 손봉상(孫鳳祥·1861~1936)과 공성학(孔聖學·1879~1957)이 삼업조합(蔘業組合)의 조합장과 부조합장 신분으로 1928년 대만과 홍콩을 다녀온 것은 4월30일부터 6월11일까지 43일간이었다. 개성을 출발해 부산~나가사키~대만~홍콩~상하이를 거쳐 나가사키~부산~개성으로 돌아왔다.
대만에서의 일정은 5월4일부터 13일까지 열흘간이었다. 해외에서 홍삼 판매를 대행하던 일본 미쓰이(三井)사의 대만 지점을 순회하면서 한편으로 홍삼 판매를 시찰하고 다른 한편으로 대만의 역사와 문화를 살폈다.
대만에는 전통과 현대가 있었지만 개성 상인들의 기본적인 관심사는 현대에 있었다. 이들은 타이중(臺中)에서 원주민의 전통적인 생활을 둘러보았지만 그들이 현대문명에 점차 적응하고 생활이 개선돼 납세자도 나오고 개업의도 배출되는 현실에 주목했다. 타이중 원시림의 수령 3000년 된 신목인 홍회목(紅會木)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기도 했지만 정작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은 원시림의 목재를 운송하려고 가설한 철도 정류장의 치밀한 설계 구조였다.
끝으로 한가지 팁. 이들 개성 상인이 대만에 체류하던 기간에 또 한 명의 한국인이 일본 고베에서 배를 타고 대만에 왔다. 그의 이름은 신채호(申采浩). 한 달 전 중국에서 한국인 아나키스트 대회를 열었던 그는 아나키즘 운동의 자금을 확보하러 대만에 왔다가 기륭(基隆)에서 즉각 체포됐다. 이처럼 20세기 대만을 향한 한국인의 발걸음에는 다양한 사연이 담겨 있었다.
노관범 < 한국고전번역원 전문위원 >
▶원문은 한국고전번역원(www.itkc.or.kr)의 ‘고전포럼-고전의 향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대북시는 대만의 서울로 총독부 및 주청(州廳), 기타 각 관아의 소재지다. 학교, 병원, 박물관, 도서관, 식물원 등 문화시설이 완비되어 있지 않음이 없다. 도로는 넓고 깨끗하고 건축은 화려하고 장엄하다. 쌀과 차를 거래하는 중심지이기 때문에 점포가 번창하고 상업이 융성하다. 담수가 관류하고 풍경이 수려하며 인구는 이십만이라 한다. (…)차를 몰아 약 40분이 지나 담수 항구에 이르렀다. 항구는 대북 시에서 13리 떨어져 있다. 이 항구는 일찍이 지나(支那)와 무역하는 중요한 항구였다. 수십 년 이래 조수가 점차 줄어들고 모래톱이 고르지 않아 20톤 이상 선박은 출입할 수 없다.’
엿새 뒤 시찰단은 대만 남부 항구도시 가오슝(高雄) 남산에 올라 시를 내려다본다.
‘주청의 소재지다. 인구 4만여명이고 쌀, 사탕, 철제품 등의 무역액이 1억8000만원이다. 남방의 유일한 양항(良港)으로 현재 비록 기륭(基隆)에 버금가지만 새롭게 일어나 발전할 희망이 있다. 만이 깊고 넓고 해안이 튼튼해서 8000톤급 거함 10여척이 능히 정박할 수 있다. 확장에 착수해서 공사가 완성되면 1만톤급 선박도 쉽게 출입할 수 있을 것이라 한다.’
오후에는 대남(臺南)으로 향해 정성공을 모시는 신사를 둘러본다.
‘신사는 정성공을 위해 설립된 것이다. 정성공은 명말(明末) 때 사람이다. 그 아버지가 무역 때문에 일본 규슈 나가사키에 건너가 일본 여자에게 장가 가서 정성공을 낳았다. 그 아버지는 다시 오지 않았고 어머니가 어린 아이를 데리고 명나라에 와서 살게 됐다. 명나라가 망할 때가 돼 명조의 자손을 이끌고 난을 피해 여기에 와서 먼저 살던 화란(和蘭) 사람과 서로 용납하지 못해 싸우다가 비로소 승리를 얻어 통치권을 장악하고 이 땅을 주재하고 동평왕(東平王)으로 추봉되었는데 이것이 약력이다.’
조선시대에 효종(재위 1649~1659)은 북벌의 비원을 이루지 못하고 서거한 임금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효종의 재위 기간 중국 대륙에서 실제 북벌이 시도되고 있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것 같다.
북벌의 주인공은 샤먼(厦門)의 해상 세력인 정성공. 그는 남명(南明) 영력제(永曆帝)의 신하로서 대군을 이끌고 양자강을 거슬러 올라가 남경(南京)을 공략했다. 이 작전은 실패했지만 그는 1661년 대만으로 건너가 네덜란드 세력을 격파했고 비록 그는 이듬해 급사했지만 정씨 일가는 23년간 대만을 지배했다.
조선 사회가 대만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이 무렵이다. 조선의 대만 인식은 동아시아 국제 질서의 변화에 따라 크게 숙종대, 정조대, 고종대, 이렇게 약 100년 주기로 세 단계의 변화가 있었다.
숙종대에는 정성공의 해상세력에 대한 사회적인 위기의식이 높았다. 정성공이 충청도에서 가까운 해도에 머무르고 있다는 소문, 정성공이 50척의 배에 병사 수만을 이끌고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서울을 공략할 것이라는 소문, 정성공이 한반도에서 새 왕국을 건설할 것이라는 소문이 대책 없이 떠돌았다.
정조대에는 청조 건륭제 치하의 대만에 대한 호기심이 높았다. 당시 조선 사절단은 중국의 궁궐에서 몽골 베트남 미얀마 등 중국 주변 각국 사절단을 볼 수 있었고 그 중에는 대만의 생번(生蕃)도 포함돼 있었다. 고종대에는 대만으로 뻗어가는 일본 세력의 확장에 대한 불안감이 높았다.
그러나 조선시대 사람들이 대만에 가야겠다는 명확한 목적의식을 안고 직접 방문해 대만의 전통과 현대를 체험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렇게 볼 때 20세기 전반 식민지 조선에서 《향대기람》이 출간된 것은 한·대만 교류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생각된다.
개성 상인 손봉상(孫鳳祥·1861~1936)과 공성학(孔聖學·1879~1957)이 삼업조합(蔘業組合)의 조합장과 부조합장 신분으로 1928년 대만과 홍콩을 다녀온 것은 4월30일부터 6월11일까지 43일간이었다. 개성을 출발해 부산~나가사키~대만~홍콩~상하이를 거쳐 나가사키~부산~개성으로 돌아왔다.
대만에서의 일정은 5월4일부터 13일까지 열흘간이었다. 해외에서 홍삼 판매를 대행하던 일본 미쓰이(三井)사의 대만 지점을 순회하면서 한편으로 홍삼 판매를 시찰하고 다른 한편으로 대만의 역사와 문화를 살폈다.
대만에는 전통과 현대가 있었지만 개성 상인들의 기본적인 관심사는 현대에 있었다. 이들은 타이중(臺中)에서 원주민의 전통적인 생활을 둘러보았지만 그들이 현대문명에 점차 적응하고 생활이 개선돼 납세자도 나오고 개업의도 배출되는 현실에 주목했다. 타이중 원시림의 수령 3000년 된 신목인 홍회목(紅會木)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기도 했지만 정작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은 원시림의 목재를 운송하려고 가설한 철도 정류장의 치밀한 설계 구조였다.
끝으로 한가지 팁. 이들 개성 상인이 대만에 체류하던 기간에 또 한 명의 한국인이 일본 고베에서 배를 타고 대만에 왔다. 그의 이름은 신채호(申采浩). 한 달 전 중국에서 한국인 아나키스트 대회를 열었던 그는 아나키즘 운동의 자금을 확보하러 대만에 왔다가 기륭(基隆)에서 즉각 체포됐다. 이처럼 20세기 대만을 향한 한국인의 발걸음에는 다양한 사연이 담겨 있었다.
노관범 < 한국고전번역원 전문위원 >
▶원문은 한국고전번역원(www.itkc.or.kr)의 ‘고전포럼-고전의 향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