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시라이ㆍ왕리쥔 운명 바꾼 '헤이우드 독살'
보시라이ㆍ왕리쥔 운명 바꾼 '헤이우드 독살'
왕리쥔(王立軍) 전 중국 충칭시 부시장은 왜 자신의 보스인 보시라이(薄熙來) 전 충칭시 서기를 배신할 수밖에 없었을까. 보 전 서기의 부인인 구카이라이(谷開來)는 왜 아들의 후견인이자 자신의 연인으로 알려진 영국인 사업가 닐 헤이우드를 독살했을까. 구카이라이의 범죄사실은 어떻게 드러나게 됐을까.

대만 연합보는 25일 한 편의 드라마와 같은 보 전 서기의 실각 사태의 전말을 자세히 소개했다. 이 신문은 이번 사건을 잘 파악하고 있는 중국과 대만 소식통의 증언을 모아 배신과 음모, 비리, 암살로 얼룩진 희대의 사건을 일목요연하게 재구성했다.

◆구카이라이가 직접 헤이우드 살해

구카이라이는 욕심이 많은 여자였다. 자신과 사귀는 연인이 결혼한 상태인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녀는 헤이우드에게 중국인 부인과 이혼하라고 요구했다. 그가 말을 듣지 않자 자신을 진정으로 대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구카이라이는 헤이우드에게 2억파운드의 재무고문 비용을 내야 할 상황이었다. 그러나 구카이라이와 보시라이는 그에게 돈을 주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이런 분위기를 눈치챈 헤이우드는 보시라이 부부가 지난 수년간 국외로 빼돌려 세탁한 자금에 대한 증거자료를 수집했다. 보시라이 부부 역시 헤이우드의 이런 행동을 알아차렸다.

보시라이 부부는 오는 10월께 18대 당대회를 앞두고 최고지도자 입성에 치명타를 줄 수 있는 헤이우드를 제거해야겠다는 판단을 했다. 구카이라이는 헤이우드에게 자신의 생일이 곧 돌아온다며 둘이서 밀회를 즐기자며 그를 충칭으로 불렀다. 헤이우드는 찜찜한 마음이 들었지만 돈을 받기 위해 충칭에 왔다. 구카이라이는 호텔로 헤이우드를 찾아와 자신이 직접 끓은 국을 마시게 했다. 국에는 미리 청산가리를 풀었다. 헤이우드는 그 자리에서 절명했다. 작년 11월14일이었다.

◆보시라이와 왕리쥔의 반목

다음날 보시라이는 측근인 왕리쥔을 불러 난산리징두자(南山麗景渡假)호텔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처리하라고 지시했다. 피살자는 놀랍게도 왕리쥔도 알고 있는 헤이우드였다. 왕리쥔은 헤이우드의 사체를 보고 단박에 그가 독살된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호텔에 설치된 CCTV의 영상을 확인하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헤이우드의 방에서 마지막으로 나온 사람이 다름 아닌 구카이라이였기 때문이다.

그는 보시라이가 자신을 사건의 뒤처리를 하는 ‘청소부’로 쓰려는 것을 직감했다. 그는 부검의를 불러 헤이우드의 시신에서 살점을 떼어내도록 한 뒤 이를 보관했다. CCTV의 영상을 따로 보관한 것은 물론이다.

당시 왕리쥔은 역사책을 하나 읽고 있었다. 거기에는 진시황이 생전에 만든 능의 비밀을 지키려고 공사를 지휘한 총감독까지 죽였다는 대목이 나온다. 자신의 운명을 예감한 왕리쥔은 보시라이 부부에 대해 도청은 물론 보시라이의 언행을 녹음해 은밀한 장소에 따로 보관했다.

사건은 그렇게 묻히는 듯했다. 그러나 왕리쥔 밑에서 헤이우드 사건을 조사했던 형사들이 하나 둘 퇴직신청을 했다. 보시라이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왕리쥔은 이런 상황을 보시라이에게 보고했다. 보시라이는 왕리쥔이 자신을 협박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그는 왕리쥔이 헤이우드 사건에 대한 물증을 확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왕리쥔이 결정적으로 보시라이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일이 발생했다. 2월 초 열린 내부간부회의였다. 보시라이는 갑자기 “왕리쥔이 오랫동안 공안국장을 맡아 스트레스가 너무 심하다”며 “힘이 덜 드는 자리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더 나아가 그는 “왕리쥔이 우울증을 앓고 있는데 우울증 환자는 자살하기도 쉽다”고 말하며 손가락으로 머리에 총을 쏘는 모습을 연출했다. 그 모습을 본 왕리쥔은 등골이 오싹했다. 왕리쥔은 다음날 쓰촨성 청두(成都)의 미국총영사관에 망명을 요청했다.

◆왕리쥔, 구카이라이 범죄 입증

왕리쥔이 들어오자 미국영사관은 즉각 게리 로크 주중대사에게 연락했고 곧바로 워싱턴의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과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게 보고됐다. 그러나 오바마 행정부는 왕리쥔이 정치박해를 받는 반체제 인사나 인권활동가가 아니어서 망명을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더구나 그는 보시라이와 함께 공산주의를 찬양하고 범죄와의 전쟁을 핑계로 인권을 탄압했던 사람이었다. 결국 왕리쥔은 미국영사관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만일을 생각해 보시라이의 비리를 담은 자료중 일부를 남겨놓았다. 중국 당국이 진상을 은폐하고 자신을 제거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그 때문에 중국 정부는 왕리쥔 사건을 더는 숨기지 못하고 공개 확인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왕리쥔이 보관한 헤이우드 암살 관련 증거들은 결국 중국 당국으로 넘어가 구카이라이의 범죄를 입증하는 데 결정적인 증거로 쓰였다. 구카이라이는 범죄사실을 모두 자백할 수밖에 없었다.

베이징=김태완 특파원 tw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