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일본 소매업체들은 모두 어려움을 겪었다. 미국발(發) 금융위기가 전 세계를 휩쓸었기 때문이다. 8월에는 베이징에서 올림픽이 열렸지만 경기는 좋아지지 않았다. 도요타자동차가 적자를 기록할 정도였다. 의류업계는 소비가 살아나지 않아 부도를 내는 기업이 속출했다. 살아남은 기업도 적자에 허덕였다.

하지만 야나이 다다시(柳井正) 회장이 이끄는 패스트리테일링은 예외였다. 대표 브랜드인 ‘유니클로’가 가을에 판매를 시작한 보온 내의 ‘히트텍(Heat Tech)’이 대히트한 덕이다. 히트텍은 11월 한두 종류씩 품절되기 시작했다. 12월 초에는 준비한 2800만장이 모두 동났다. 결과는 매출 증가로 이어졌다. 2009년 8월 결산에서 패스트리테일링은 1년간 매출 6850억엔, 영업이익 1086억엔을 기록했다. 전년보다 각각 16.8%, 24.2% 증가했다.

주가는 상승했다. 야나이 회장은 미국 경제주간 포브스가 발표한 ‘2009년 일본 갑부’ 순위에서 1위에 올랐다. 포브스는 올해 3월 그의 재산이 106억달러라고 발표했다.


○“쉽게 살 수 있는 옷을 만들자”

히트텍이 붐을 일으킨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히트텍은 얇으면서도 속옷보다 훨씬 따뜻했다. 또 소재가 합성섬유여서 다양한 상품을 개발하기 쉬웠다. 가격도 1000엔 내외로 저렴했다.

저가격·고품질·고기능은 야나이가 1984년 일본 히로시마에 유니클로 1호점을 낼 때부터 지켜온 원칙이다. 유니클로 1호점은 야나이가 ‘옷도 라면이나 식품처럼 편의점 같은 곳에서 간편하게 살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으로 만든 옷가게였다. 이곳에 가면 손님들은 면바지와 셔츠, 재킷, 스웨터, 양말, 속옷 등이 색상과 사이즈별로 진열돼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가격도 대부분 1000엔 미만이었다. 식료품가게에서 계란과 간장을 사듯 유니클로에서 면바지와 셔츠를 사는 사람이 늘었다. 야나이는 매장 이름도 ‘유니크 클로딩 웨어하우스(Unique Clothing Warehouse)’라고 지었다. 다른 곳에서는 살 수 없는 질 좋은 옷을 자유롭게 골라 살 수 있다는 의미다. 이후 이름을 ‘유니클로’로 바꿨다.

야나이는 사업이 커짐에 따라 질 낮은 옷이 들어오는 것에 불만을 갖기 시작했다. 싸고 질 좋은 제품을 판매할 수 있는 더 좋은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그가 찾은 해법은 제조부터 생산, 판매까지 직접 하는 SPA(제조·직접판매형 의류) 방식이었다. SPA는 중간 유통단계를 줄일 수 있기 때문에 싼 값에 자사 브랜드 상품을 공급할 수 있는 게 장점이다. 야나이에게 영감을 준 사람은 홍콩에서 만난 지미 라이라는 사업가였다. 지미 라이는 원래 미국 회사에서 하청받아 의류를 생산하다 SPA 방식 캐주얼 의류 전문점 ‘지오다노’를 창업해 크게 성공한 인물이다. 야나이는 그를 벤치마킹했다.

○‘플리스’ 옷 성공…SPA 브랜드로 변신

하지만 회사의 판매력이 문제였다. SPA 브랜드 의류는 제조한 상품을 직접 팔아야 하기 때문이다. 재고를 남기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재고는 곧바로 회사의 손실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야나이 회장은 조심스럽게 매장 수를 조금씩 늘려가기 시작했다.

1998년 SPA 브랜드를 원하던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경기 불황을 틈 타 출시한 ‘플리스’란 옷이 큰 인기를 모으며 유니클로 판매가 급증하기 시작한 것. 플리스는 화학섬유인 폴리에틸렌을 양털처럼 부드럽게 만든 원단이다. 가볍고 얇으면서 보온성이 좋아 등산복 등 보온용 소재에 주로 쓰인다. 야나이 회장은 이 소재로 옷을 만들면 불황에 난방비를 아끼려는 사람들이 많이 사갈 것으로 봤다. 예상은 적중했다. 플리스는 1998년 200만장, 1999년 850만장이 팔려 나갔다. 2000년에는 2600만장을 파는 기록을 세웠다. 플리스의 인기를 타고 야나이는 매장 수를 늘렸다. 2000년 8월 유니클로 매장은 일본 전국에 433개까지 증가했다.

이후 야나이 회장은 유니클로를 해외 협력 제조업체에 발주해 회사가 원하는 모델을 만드는 ‘팔고 싶은 물건만 파는’ SPA 브랜드로 바꿨다. 대량으로 물건을 발주해 단가를 낮춘 것은 물론이다. 1900엔짜리 초저가 플리스를 팔 수 있었던 비결이다. 중국 등 해외 협력업체에는 일본인 직원을 직접 파견해 품질을 관리했다.

그는 해외 협력업체와 깊은 신뢰관계를 쌓는 데도 신경썼다. 제조업체들이 유니클로를 믿어야 높은 품질의 제품이 나올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야나이 회장은 협력업체에 발주한 뒤 재고에 대한 책임을 전적으로 유니클로가 떠안겠다고 선언했다. 협력사들은 다른 의류회사보다 유니클로가 주문한 제품을 먼저 생산해주는 것으로 보답했다.

○실패하면 다시 일어난다…모험형 기업가

승승장구하는 듯했던 야나이 회장에게도 실패가 찾아왔다. 1997년 시장 확대를 위해 ‘스포크로’ ‘패미크로’라는 브랜드 의류를 판매했다. 그러나 사업성이 없어 1년 만에 접었다. 유니클로와 차별화하지 못한 것이 실패 이유였다. 2002년에는 식료품 사업 자회사인 ‘에프알푸드’를 설립해 채소도 판매했다. 에프알푸드는 유기농법으로 재배한 고급 농산물을 팔았지만, 패스트리테일링에 어울리지 않는 비싼 가격이 발목을 잡았다. 결국 2004년 폐업했다.

하지만 야나이 회장은 사업 실패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실패했지만 신사업을 통해 나태해진 회사 분위기에 자극을 줄 수 있었다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유니클로가 ‘플리스’ 성공 이후 무사안일주의에 빠져 있다고 생각했다. 회사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고자 2002년 회장으로 일선에서 물러나고, 사장직을 젊은 임원에게 물려주기도 했다. 하지만 회사는 변화하지 않았다. 그는 2005년 다시 경영 일선으로 복귀했다. 복귀한 이후에는 ‘시어리’ ‘원존’ ‘꼼뜨와 데 꼬또니에’ ‘프린세스 탐탐’ 등의 브랜드를 인수해 사업 확장을 서둘렀다.

실패를 두려워 않는 그의 성격은 첫 번째 자서전인 ‘1승9패’라는 제목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야나이 회장은 2008년 TV도쿄에 출연해 “실패할 것이라면 빨리 경험하는 것이 낫다”며 “빨리 실패하고 빨리 수습하는 것이 내 성공비결”이라고 말했다.

야나이 회장은 ‘유니클로 제국’을 이룩했다. 11개국에 1000개가 넘는 매장을 갖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출 그가 아니다. 그는 최근 본격적인 미국 시장 공략을 시작했다. 샌프란시스코에 매장을 열고 앞서 진출한 뉴욕에서도 매장 수를 20~30개 늘리기로 했다. 다른 국가에서도 사업을 확대할 계획이다. 그는 월스트리트저널과의 인터뷰에서 “2015년까지 해외 판매가 일본 내 판매를 넘어설 것”이라며 “6월 필리핀에 매장을 내고 내년엔 호주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에도 진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김동현 기자 3cod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