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사실과 ‘악의 제국’이 지닌 공격적 충동을 더이상 못 본 척 해서는 안 된다. 양쪽이 모두 동등하게 잘못이 있다고 태평스럽게 선언하거나 옳고 그름, 선과 악의 투쟁을 외면하는 잘못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폭탄 발언’이었다. ‘무모하리만큼 적대적’이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당시의 분위기는 그랬다. 진보 언론은 물론 지지자들도 그의 ‘악의 제국’ 발언에 경악했다. 일부 참모들조차 그가 너무 지나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1983년 3월8일, 종교 지도자들의 모임에서 연설한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확신에 차 있었다. 지구의 절반 가까이를 농단해온 소련제국의 몰락을 밀어붙이는 기폭제가 된 연설이었다.

세계 역사를 바꾼 ‘통찰력’

1970년대와 80년대 초반은 좌파 이념이 중남미와 아시아, 아프리카에서 맹위를 떨치던 때였다. 미국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만신창이 상태였다. 치솟은 에너지가격이 경제를 마비시켰고, 이란 인질구출작전에 실패한 미국 정부는 세계의 조롱거리가 돼 있었다. 수세에 몰린 서방 지도자들은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기에 급급했다.

당대 최고의 지성이라던 몇몇 미국 학자들은 세치 혀를 놀려 ‘악의 제국’을 더욱 기고만장하게 했다. 하버드대의 존 갤브레이스는 “노동력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소련의 시스템은 서구 산업경제와 대조적으로 성공적”이라고 했고, MIT의 폴 새뮤얼슨은 “소련 모델은 계획경제가 급속한 성장에 필요한 자원을 동원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줬다”고 치켜세웠다.

레이건에게 그런 따위의 말들은 가당치 않은 궤변일 뿐이었다. 그는 전기작가 리처드 리브스에게 “소련의 국가시스템은 ‘경제 또는 정치체제’가 아니었다”고 강조했다. 그것은 단지 “광기로부터 발생한 일시적 현상이며, 인간 본성에 반하기 때문에 이 지구상에서 없어질 것”에 불과했다. 공산독재가 민주자본주의보다 열등하다는 데 한점의 의심도 없었다.

레이건은 이런 신념아래 1981년 초 취임하자마자 국방비를 대대적으로 증액하고, 정밀한 미사일 기술과 전략방위구상(스타워즈)에 과감하게 투자했다. 소련이 감당할 수 없는 군비경쟁을 통해 경제를 황폐화시켜, 가증스런 가면을 벗도록 하겠다는 계산에서였다.

누가 진실을 말할까

미국 역사학자 아서 슐레진저는 “미국에서 소련의 경제와 사회가 붕괴 직전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낙관론자들뿐”이라고 비아냥댔지만, 정작 소련 국민들 사이에서는 “이제서야…”라는 반응이 나왔다. 소련 내에서 ‘악의 제국’이란 말이 속담처럼 널리 퍼졌고, 반체제 지식인들의 용기를 한층 북돋웠다. “드디어 자유세계의 지도자가 진실을 말했다.”(나탄 샤란스키) 소련 경제는 당시 서방 전문가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붕괴 직전에 있었다.

요즘 북한 정권은 30년 전의 소련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막장으로 치닫고 있다. 국제사회에 구걸하지 않고는 먹는 문제조차 해결할 수 없는 지경으로 경제를 파탄 내놓고도, ‘최고존엄’을 ‘결사옹위’하는 데 알량한 자원을 탕진하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를 향해 ‘역적패당’ ‘쥐새끼무리들’이라는 극언을 서슴지 않고, “혁명무력의 대남특별행동을 곧 개시할 것”이라는 협박까지 내뱉었다. 갈데까지 간 이런 공갈에 대해서마저 “이 정부의 대북 강경 일변도 정책이 불안과 위기를 몰고 왔다”는 식으로 두둔하는 주장은 듣기만 해도 신물이 난다. 이 시대의 레이건은 없는가.

이학영 편집국 부국장 ha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