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일 서울 논현동 교보타워 사거리. 새벽 1시가 가까워오자 한적한 거리가 30~40명의 대리기사들로 북적였다. 매일 새벽 1~4시 셔틀버스를 기다리는 대리기사 수백명이 몰리고, 대리업체·포장마차 등이 20여곳 밀집해 있어 기사들이 ‘대리타워 사거리’라고 부르는 곳이다.

대로변 한쪽에 ‘대리운전 5대 악(惡)을 철폐하라’ ‘부당한 벌금제도 전면 철폐!’ 등의 플래카드가 내걸린 간이 천막이 자리잡고 있었다. 천막을 세운 이들은 서울·경기지역 대리기사 모임인 ‘대리기사권익실천연대(약칭 대리연대)’ 회원들. 천막 앞 스피커에서 나온 울분의 목소리가 새벽 공기를 갈랐다. “매서운 새벽 바람 맞아가며 이리 뛰고 저리 구르는 대리기사들을 ‘노예’ ‘봉’ ‘착취의 대상’으로 삼는 악덕 업체가 너무 많습니다. 기사들 생존권을 위협하는 벌금, ‘똥콜’을 철폐합시다!” 셔틀버스를 기다리던 기사 수십명이 박수를 쳤다.

대리연대 회원 10여명은 지난 2월부터 매주 화요일 밤 이곳에서 ‘대리업체 비리와 불공정 관행 근절’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다. 석 달 동안 2900여명이 동참했다. 이들은 “2~3년 전 포화상태에 달해 제살깎기 경쟁을 벌이는 대리업체가 기사들을 착취해 손실을 보충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2005년 이후 업체들이 난립하면서 대리운전 업계의 불공정 관행·세금 누락 등 양적 성장에 가려진 그늘이 짙게 드리우고 있다. 이들 업체는 행정기관에 신고 없이 세무서에 일반사업자 등록만 하면 돼 영세업체들은 대리기사로부터 받는 수수료와 각종 부가수익에 세금 한 푼 내지 않고 있다. 대리기사를 찾는 ‘콜’ 취소 시 기사에 벌금을 부과해 손실을 보전하고, 기사들이 내는 보험료를 중간에서 가로채는가 하면 업체끼리 담합해 수수료·콜 프로그램 사용료를 올려 받는 것도 흔한 일로 확인됐다. 그러나 현행법에는 대리업체를 관리·단속·제재할 법적 근거도, 감독 당국도 없다. 이러한 무관심이 만들어낸 ‘치외법권’ 지대에서 업체들은 세금 누락을 일삼으며 워킹푸어(working poor)인 대리기사들과 대립하고 있다.

◆3조원 시장…국내 아웃도어시장과 맞먹는 규모

국내에 대리업체가 생기기 시작한 것은 2000년 초. 10여년 새 등록된 대리운전업체는 7000여개를 넘어섰다. 이들 업체에 소속된 대리기사만 10만명에 달한다. 시장 규모만도 연 3조원으로 추산된다. 지난해 국내 출판시장(3조2000억원), 일본 모바일게임시장(2조6000억원), 올해 국내 아웃도어시장(3조원)과 맞먹는 규모로 급성장했다.

국내 대리운전업체 ‘빅3’는 K드라이브, C대리운전, T대리운전. 이들은 2000년 초 설립된 대리운전 1세대다. 업계 1위인 K드라이브의 연매출 규모는 300억원. 한 해 광고비로만 50억원을 쓴다. 소속 대리기사만도 4700명. C대리운전과 T대리운전 매출은 K드라이브 절반 수준이다. 소속 기사는 1200~2000명이다.

영세업체의 난립부터 풀어야 할 숙제다. 미등록 업체까지 포함하면 대리업체 수는 최대 1만개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들 가운데 60~70%가 ‘1인’ 업체다. 영세 업체가 난립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오영태 T대리운전 이사는 “창업이 까다롭지 않고 돈이 된다는 소문에 너도나도 뛰어들면서 우후죽순식으로 업체들이 생겨나고 있다”며 “제살 깎기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이런저런 문제점이 생기는데 이른 시일 내에 요금체계나 기사 채용조건 등 관련 법안이 마련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업체 난립 후유증…보험료 가로채기 성행

급성장에 따른 휴유증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5~6년 전부터다. 1인 업체가 급증하면서 대리운전비 낮추기 경쟁이 시작됐고, 이를 견디지 못한 업체가 사라지기도 했지만 살아남은 업체들은 새로운 수익원 창출에 혈안이 됐다.

원가보전도 안 되는 대리기사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눈을 돌린 건 소속 대리기사들의 ‘얇은 지갑’이었다. 콜을 받지 않을 때 물리는 벌금과 보험료 가로채기가 대표적이다.

대부분의 업체는 보험 가입을 채용 조건으로 내건다. 업체들은 보험사로부터 알선 수수료를 받는 보험 브로커를 두고 자기회사 소속 기사들에겐 단체 보험을 들게 하는데, 여기서 비리가 싹튼다. 보험 브로커가 대리기사가 내는 보험료를 20~30% 부풀려 받은 뒤 이를 다시 대리업체와 나눠 갖는 일이 관행처럼 일어난다. 지난 2월 대구에서 대형 대리업체 2곳의 임원 8명이 보험 브로커와 짜고 기사들의 보험료 1140만원을 가로챈 혐의로 경찰에 적발된 사건은 ‘빙산의 일각’이다. 대리연대에 따르면 대리기사들이 매달 내는 보험료는 6만5000원 정도. 인천의 한 대리업체 관계자는 “이 중 4만원만 보험사로 가고 나머지 2만5000원은 업체와 브로커가 챙긴다고 보면 된다”며 “소속 기사가 1000명인 업체라면 매달 1000만원이 넘는 돈을 챙길 수 있는 셈”이라고 했다.

보험료는 다 받아놓고, 예컨대 기사 100명 중 50명분의 계약만 체결하는 식으로 가입 인원을 조작하는 수법도 있다. 이런 경우 해당 기사는 보험료를 꼬박꼬박 내고도 사고가 일어나면 보험 처리를 거부당한다. 대리기사들이 가입하는 보험도 종합보험이 아닌 최소한만 보장되는 책임보험과 비슷한 대리운전업자 보험이다. 대리운전의 대형사고에서 차량 소유주가 덤터기를 쓰는 것도 이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지만 대리기사들에겐 자신의 보험 가입 여부, 보험료, 특약 조건을 체크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업체가 보험증서를 보여주기 꺼리는 데다 다른 기사들과 동일한 증권번호를 부여받기 때문에 정보 확인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보험업계 관계자는 “이들이 가입한 보험은 특약 조건도 최소한만 보장하도록 돼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벌금제도 대리기사들이 꼽는 대표적인 갈취 수단이다. 손님에게서 접수한 콜을 보냈는데 운행료·출발지·도착지 등의 내역을 제대로 못 보고 기사가 이를 취소하면 건당 500~1000원의 벌금이 부과된다. 문제는 대리기사들의 이 벌금이 최종적으로 누구 몫이 되는지 알 길이 없다는 것이다.

관련법 없고 감독 손길 못 미쳐…세금 포탈 온상

영세업체들의 난립으로 소비자와 대리운전기사들의 피해가 늘고 있지만 정작 관계 당국은 손을 놓고 있다. 애당초 ‘자유업’이어서 주무 부처가 없었고 그동안 대리운전업을 운수업으로 해석해야 할지, 교통안전(서비스)업의 영역으로 나눌지에 대해 국토해양부와 경찰청이 서로 소관업무가 아니라며 떠넘겨 왔다.

업계의 불공정 관행과 대리기사에 대한 열악한 처우를 인식하고 국회에서도 2007년에 이어 2009년에 정의화·손숙미 한나라당 의원이 ‘대리운전 입법안’을 발의했지만 18대 국회임기가 끝나 자동폐기됐다. 이 법안엔 △대리운전 사업 관내 기초자치단체 등록 △ 3년 이상의 운전 경력과 교육 이수 △소속 기사 현황 기초자치단체에 신고 △기사의 신고필증, 보험 가입증명서 등을 제출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수년간 두 부처가 미루기를 하는 동안 연간 수억원의 수익을 올리는 대리업체들도 4800만원 이하의 간이과세업인 영세업체로 등록·신고해 탈세를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리운전업이 행정기관에 등록하지 않고 세무서에 일반사업자 등록만 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자유업이어서 대리기사가 벌어오는 수수료와 각종 부가수익에 대해 세금을 한 푼 내지 않아도 제재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국세청 관계자도 “이용자의 제보나 뚜렷한 탈세증거가 없으면 업체들을 조사하기 어렵다”고 털어놨다.

한국대리운전협회 관계자는 “법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기사들이 법제화를 통해 정당한 대우를 받아야 고객들도 제대로 된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배용훈 K드라이브 경영지원과장은 “큰 업체들은 모든 게 공개돼 있는데 보험료 갈취 등 오해를 받고 있는 만큼 조속히 대리운전법이 통과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하헌형/이지훈 기자 hh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