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부채가 1000조원인데 은행 대출금의 이자계산서는 본 적이 없다. 매달 이자가 빠져 나간 금액만 통장에 선명히 찍힐 뿐이다. 금리가 몇 %인지, 올랐는지 내렸는지도 알 수 없다. 설마 은행이 사기야 치겠나 싶어 그냥 넘어간다.

연간 10조원을 거둬가는 변액연금보험 수익률이 물가 상승률만도 못하다느니, 계산이 잘못됐다느니 해서 큰 논란을 빚었다. 그래도 한 가지 소득은 있다. 고객이 낸 원금의 11~12%를 보험사가 사업비로 먼저 떼간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게 됐다. 퇴직연금, 개인연금이 고객돈을 고작 정기예금에 묻어두고 소득공제로 수익률을 메운다는 정보는 덤이다.

금융회사 프라이빗뱅커(PB)들이 한결같이 권하는 게 즉시연금보험이다. 노후대비에 적합하다지만, PB에게 떨어지는 수수료가 3%대로 가장 짭짤한 게 숨은 이유다. 이해상충이 아닐 수 없다. 은행들은 보험상품 판매에 혈안이다. 판매수수료가 펀드는 1%인데 보험은 4~7%나 된다. 은행권의 작년 수수료 수입은 4조9000억원으로 사상 최대다. 고객 불만을 야기하는 ATM, 송금 등의 수수료는 소폭 줄이는 시늉을 한 대신 보험 판매수수료로 대박을 냈다.

너도나도 수수료 따먹기 혈안

증권사들이 주가연계증권(ELS)에 열을 올리는 이유도 똑같다. 펀드는 1년에 한번 떼는 수수료를 ELS는 수시로 조기상환하고 수수료를 새로 뗄 수 있으니 금상첨화다. 돌리면 돌릴수록 수익이 올라가는 옵션 주식워런트증권(ELW) 이종통화거래(FX마진거래)도 있다. 물론 거래소 등 유관기관들은 거래액에 비례해 고리도 늘어나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격이다.

국민 혈세로 168조원의 공적자금을 쏟아부어 살려낸 한국 금융의 불편한 진실들이다. 10여년이 흐르도록 달라진 게 없다. 은행 숫자가 30개에서 절반으로 줄어든 대신 금융지주마다 상왕(上王)을 모셔오고, 은행원들이 억대 연봉자가 된 것 말고 뭐가 있나.

금융의 후안무치는 정책 실패의 결과다. 역대 정권마다 금융허브니 메가뱅크니 장밋빛 그림을 그려대고, 금융이 미래 먹거리라며 치켜세웠다. 전형적인 대물(大物) 콤플렉스가 아닐 수 없다. 은행에 만리장성 같은 진입장벽을 쳐주고 펀드 보험 파생상품까지 모두 팔 수 있는 만능열쇠를 쥐어줬다. 그 결과 앉아서 조(兆) 단위 이익을 못 내면 바보 취급 받는다. 하지만 허가·면허산업인 금융에서 아이폰이나 갤럭시S처럼 혁신상품이 나올 순 없다.

기본기 안 갖추고 홈런만 노려

김석동 금융위원장은 “21세기에 어떻게 키코 같은 상품이 나올 수 있느냐”고 개탄했다. 그러나 K대 재단이 200억원대 투자손실을 본 ELS도 실은 키코와 매우 유사한 구조다. 지금도 창구에선 파는 사람조차 뭔지도 모르고, 제대로 알리지도 않고 파는 불완전판매가 비일비재하다. 오죽하면 은행 판매상품을 원금이 보호되는 저위험 상품으로 국한하자는 얘기가 나올 정도다.

피해가 생겨도 금융당국이 나몰라라 하니 피해자는 스스로 법원 문을 두드려야 한다. 금융소비자보호법 제정안은 19대 국회로 넘어갔다. 미봉책으로 금융소비자보호처를 금감원 산하기구로 설치했다. 머리만 커지고 하체는 더 부실해지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기본기도 못 갖춘 선수에게 홈런만 요구한 결과가 온갖 금융비리, 투자손실, 저축은행 사태다. 국민들에게 지난 10여년은 금융수난시대였다. 금융이 사기나 안 치고, 사고나 안 나면 다행이라고 여긴다. 금융은 무엇보다 정직해야 한다. 면허증과 고연봉에 요구되는 최소한의 의무다.

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