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과 삼성 등 글로벌 기업들이 특허 출원 경쟁과 잇따른 소송전에 사활을 걸고 있다. 최대 소송 격전지인 미국에서도 국제무역위원회(ITC)가 있는 워싱턴은 특허전쟁의 중심지다. 그러다 보니 워싱턴에는 특허 소송을 대리하는 수많은 로펌들이 진을 치고 있다. 이곳에서 피네간은 변호사 숫자와 소송 실적 등에서 미국 1위의 특허 전문 로펌으로 꼽힌다.

늦깎이로 피네간에 진출해 파트너 변호사 자리에까지 오른 선우찬호 변호사(65). 그는 한국계 특허변호사들의 대부격이자 로망이다.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5년 미국으로 건너가 유학한 뒤 현재의 자리에 이르렀다.

그는 3개 대학을 거쳐 3개 대학원을 나왔다. 아이오와주 그레이스랜드칼리지와 워싱턴에 있는 조지워싱턴대에서 각각 1년 동안 물리학을 공부한 뒤 UC버클리 전자공학과를 졸업했다. 오하이오주립대 대학원에서 전자공학 석사 학위를 받은 뒤 노스웨스턴대에서 경영학석사, 델라웨어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땄다. 제니스, IBM, 듀폰 등 세계 정상급 기업에 다니다가 성에 차지 않자 뛰쳐나왔다. 39세에 특허변호사라는 전문직으로 갈아타 성공했다. 워싱턴 인근 버지니아주의 레스톤 사무실에서 선우 변호사를 만났다.

▷고교 졸업 직후 미국 유학을 하게 된 계기는.

“형제가 5남1녀인데 모두 미국에서 공부했다. 평양 출신으로 장면 전 총리 비서실장과 국회사무처 사무총장을 지내신 선친(선우종원)의 영향이 컸다. 아버지는 미국에 한 번도 와보신 적이 없지만 세계를 이끌어갈 곳은 미국이라고 내다보셨다.”

▷물리학을 공부하다 경영학 석사와 법학 박사까지 땄는데.

“아버지는 이승만 정부 들어 3선 개헌에 반대하고선 일본에 8년간 망명하셨다. 5·16 군사쿠데타 때는 반 혁명인사로 몰려 사형을 구형받았고, 2년반 동안 수감 생활을 하셨다. 그래서인지 셋째인 나를 포함한 형제들(둘째인 선우중호 전 서울대 총장 등)에게 문과 말고 이과 공부를 시키겠다고 작심했던 것 같았다. 그래서 처음에 물리학을 공부했으나 개인적으로 만족하지 못해 결국 전자공학, 경영학, 법학을 공부했다.”

▷그게 UC버클리를 택한 이유였나.

“UC버클리 편입을 지원해 합격했다. 당시 UC버클리는 노벨상 수상자를 13명이나 배출한 대학이었다. 6명을 배출한 하버드대보다 많았다. 주로 연구만 하는 노벨상 수상자 교수들이 1,2학년생들을 가르쳤다. 150점 만점인 시험에서 나는 50점도 못 받았다. 물리학과 비슷한 것이나 해보자고 결심하고선 전자공학으로 바꿨다. 학부를 마치고 오하이오주립대 대학원으로 옮겨 전자공학 공부를 이어갔다.”

▷첫 직장은 어땠나.

“1972년 가전회사인 제니스의 연구개발 부문 엔지니어로 입사했다. 제니스는 당시 TV 개발에서 세계 1위였다. 나름대로 대학원 공부까지 하고 왔다고 자부했으나 윗사람들로부터 좋은 평가는 받지 못했다. 회의감도 들었다. 마침 경영학석사(MBA) 학위가 미국에서 선풍을 일으켰다. 그래서 들어간 게 노스웨스턴대 경영대학원이었다. 제니스에 다니면서 야간과정과 주말과정을 밟아 MBA 학위를 땄다. MBA 공부는 재미있었다. 케이스 연구를 하는 MBA 수업은 나에게 생각할 기회를 줬다.”

▷IBM으로는 옮겼는데.

“제니스가 내리막길을 탔다. 일본 소니가 무섭게 추격했다. 소니가 파는 제품은 질이 달랐다. 소니는 부품 하나하나를 테스트해서 완제품을 만들었다. 제니스는 부품 1000개 중 확률적으로 검사해 불량률이 낮으면 그 부품을 선택해 조립하던 식이었다. 새로 영입된 재무통 사장은 리서치 부서를 다 없애버렸다. MBA 과정에서 나를 사로잡았던 분야가 마케팅이었다. IBM은 당시 컴퓨터 개발과 판매에서 75%의 시장점유율을 가진 독보적 존재였다. 마케팅도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했다.”

▷기대만큼 만족스러웠나.

“IBM 안에서 특수사업팀에 발탁돼 일을 하고 있는데 이상한 얘기를 하더라. 컴퓨터를 일반 소비자들에게 1년에 100만대 팔아야 한다는 말이었다. 대형 컴퓨터를 만들어 정부나 기업체 등에만 팔던 기존 IBM의 경영 교과서엔 없던 것이었다. 난 그 와중에 마케팅을 정말 해보고 싶었다. 회사는 세일즈 경험이 없다면서 내 소원을 들어주지 않았다.”

▷결국 듀폰으로 가게됐다.

“1979년 듀폰은 전자공학을 알면서 동시에 마케팅에 관심이 있는 인력을 뽑았다. IBM과는 경영방식이 달랐다. 소비자들의 수요에 맞춰 제품을 개발하는 게 아니었다. 과학적으로 도전적인 제품을 만드는 것이 우선 목표였다. 그런 듀폰이 IBM처럼 고객을 먼저 생각하자는 쪽으로 변화를 시도했다. 특허변호사란 직업을 알게 된 것도 그때였다.”

▷특허 분야에 뛰어든 계기는.

“나는 당시 듀폰에서 카메라 전자회로용 내열 신소재를 개발하고 있었다. 한국의 삼성, LG와 관련 합작회사도 만들었다. 그런데 내 팀이 추진하는 프로젝트마다 특허변호사들이 달라붙었다. 듀폰 법률팀은 미국에서 제일 규모가 컸다. 사내 변호사가 150명이었고, 특허변호사만 70~80명에 달했다. 이 사람들이 우리가 계약할 때마다 특허 침해 여부 등을 검토하느라 프로젝트가 지연될 때가 많았다. 엔지니어인 나는 그때서야 법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래서 35세 때 델라웨어대 로스쿨에 입학했다.”

▷로스쿨 졸업 후 취업은 잘됐나.

“통상 전문 변호사를 목표로 뉴욕과 워싱턴 로펌 50군데에 지원했다. 한 곳에서도 인터뷰하자는 응답이 없었다. 다시 100개 로펌에 지원서를 보냈지만 허사였다. 안면이 있는 변호사의 조언을 얻어 특허변호사로 진로를 변경했다. 그러자 워싱턴에서 인터뷰하자는 요청이 줄줄이 왔다. 당시 3,4위 하던 로펌 피네간을 선택했다. 피네간은 제니스, IBM, 듀폰을 거치고 한국 기업들과 합작사업을 한 내 경력을 높이 평가한 것 같았다. 아시아지역에서 큰일을 하려고 한다며 나를 영입했다. 39살 때인 1988년이었다.”

▷내부 경쟁이 치열했을텐데.

“미국 로펌에서는 대개 3년 정도 변호사를 데리고 일하다가 해고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피네간 변호사들 중에는 백인이 아닌 유색 인종은 보이지도 않았다. 2년이 지나니 진로가 불안했다. 하루는 매니징 파트너에게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대뜸 물어봤다. 다른 로펌에서 오라는 유혹도 없지 않았다. 1주일 후 그가 연봉을 10만달러 더 올려줬다. 합류 6년째 되던 해에는 파트너 자리에 올랐다. 당시 나는 실적이 항상 로펌 내 톱 5나 톱 10 안에 들었다.”

▷파트너 변호사가 어떤 지위인데 그런가.

“내가 받은 지위는 회사 이익을 나눠갖는 지분(share) 파트너였다. 운 좋게도 당시 피네간은 지분 파트너 제도만 운영했다. 요즈음은 업적에 따라 보너스만 받는 파트너가 따로 있다. 내가 피네간에 합류했을 때 변호사 숫자는 70~80명에 불과했다. 지금은 변호사가 400명을 넘고, 보조직원이 800명에 달한다.”

▷한국 기업 특허 관련 업무도 맡고 있나.

“1992년 이전에는 한국 기업들과 관련된 특허 일이 없었는데 이후 삼성 사람들이 피네간을 찾아오기 시작했다. 15년 전부터 한국 기업들을 본격 대리하기 시작했는데 대형 소송이 많았다. 삼성, LG, 현대전자 등이 미국에서 대형 로펌을 활용하는 바람이 불었다. 모 한국 기업을 대리하면서 1년 소송비용이 1000만달러를 웃돌던 사례도 있었다.”

▷특허 변호사 인기가 높아지는가.

“한국 기업들과 관련된 특허소송이 급증하고 있어 로펌에 들어올 때 한국적 배경을 가진 인력이면 상대적으로 유리할 정도다. 15년 전엔 아이비리그(미국 동부 8개 명문대) 대학원생들도 특허 등 지식재산권(IP)을 잘 알지 못했다. 최근엔 지재권이 가장 빨리 성장하는 산업으로 각광받고 있다. 미국에선 이공계를 전공하는 동양계 학생들이 많다. 이들이 특허에 관심을 많이 갖고 있다.”

▷특허소송은 지속적으로 늘어날까.

“최소한 5년 정도는 꾸준히 증가할 것으로 본다. 특허권자나 특허기업들의 권리를 보호해줘야 하지만 소송 남발을 규제해야 한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최근 특허소송의 90%는 특허괴물들이 걸고 있다. 보호와 규제 어느 지점에서 균형점을 찾아야 할지가 큰 이슈다.”

워싱턴=김홍열 특파원 com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