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유로존의 상황은 한마디로 엉망(messy)입니다. 유로존 소속 국가들의 빚을 누가 갚아줄지 분명하게 결정하지 않으면 결국 무임승차하는 국가들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토머스 사전트 미국 뉴욕대 교수는 22일 ‘2012 세계 경제·금융 컨퍼런스’의 기조연설자로 나서 “한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규칙은 ‘누가, 어떻게, 무엇의 비용을 지불하는가’인데 유럽에는 지금 규칙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미합중국 설립 과정, EU와 ‘닮은꼴’

그는 단일통화(유로화)를 도입한 뒤 재정위기를 겪게 된 유럽연합(EU)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200년 전 미국의 역사에서 시사점을 얻어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은 18세기 후반까지 13개 독립적인 주정부의 느슨한 연합이었다. 관세·조세권리가 주정부에 있었고 중앙정부에는 권한이 없었다. “지금의 EU와 비슷했다”고 그는 설명했다.

하지만 1780년대 각 주정부의 부채가 지나치게 불어나자 당시 정치가인 알렉산더 해밀턴과 조지 워싱턴은 새 헌법을 만들어 선언했다. 중앙정부가 주정부의 세수를 가져오는 대신 주정부를 구제하기로 한 것이다. 이른바 대타협이었다.

사전트 교수는 지금 EU가 이런 타협을 이루기에 적합하다고 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일정한 규제를 지방정부에 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도덕적 해이를 막기 위해서다.

그는 “1820~1830년대 미국 중앙정부는 주정부들이 철도·수로 건설에 과도한 돈을 쓴 뒤 부채에 눌려 ‘2차 구제’를 요청했을 때 거절했다”고 했다. EU 역시 조세권한 등에 관한 대타협을 통해 그리스를 구제할 수 있지만 지속적인 구제를 보장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다만 그는 단일통화를 이용한다고 해서 반드시 재정통합이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유로존의 재정통합이 필요하다는 슈뢰더 전 독일 총리의 주장과도 상반된 것이다. 그는 “파나마와 짐바브웨가 미국 달러를 자국 통화로 사용한 적이 있지만 미국이 이들 국가의 재정이나 부채와 아무 관련이 없다는 것이 명확했기 때문에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고 설명했다.

◆부채관리 능력이 성장 밑바탕

그는 낮은 금리 수준을 유지해 시장에 과잉 유동성을 공급한 것이 유럽 재정위기의 한 원인이라는 일부 학계 주장에 대해서도 “버블(거품)과는 아무 관계없다”고 비판했다.

사전트 교수는 “스페인과 이탈리아 등의 문제는 버블이 아니라 세수가 뒷받침되지 않은 상태에서 부채를 계속 늘렸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겉으로 드러난 부채 외에도 복지비용이나 금융회사 도산시 구제비용 등 숨겨진 부채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사람들이 특정 국가의 국채를 사는 것은 미래에 그 정부가 상환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사전트 교수는 “미국 중앙정부가 1780년대에 주정부의 빚을 대신 갚아준 것은 채권자들의 신뢰를 얻고, 다시 돈을 빌릴 수 있는 신용을 유지하기 위한 조치였다”고 했다. 국가 이미지와 명성을 유지하고 성장의 밑바탕을 만들려면 부채를 적절히 관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유럽도 신용을 유지하려면 그리스를 구제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경기 회복 10년 걸릴 수도”

사전트 교수와의 대담은 이인실 서강대 경제대학원 교수(전 통계청장)가 맡았다. 이 교수는 미국 미네소타대에서 경제학 박사과정을 밟을 때 사전트 교수와 사제지간으로 만났다.

당분간 세계 경제가 어느 정도 성장할지를 전망해 달라는 이 교수의 요청에 사전트 교수는 “경기 회복에 오랜 시간이 소요될 것”이라고 했다. “길게는 10년을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경기침체만 겪고 있다면 회복에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겠지만 지금은 은행 등 금융회사들이 파산하는 금융위기가 같이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미국의 경제 성장이 느려진 상황에 대해 금융 분야의 무질서를 원인으로 지목했다. 사전트 교수는 “은행들이 제 역할을 못해서 위기가 발생하자 새로운 규제가 만들어졌는데 도드-프랭크법 등 새 규제가 아주 모호하기 때문에 회복을 더 더디게 만들고 있다”고 지적했다. 단순히 경기가 제 사이클을 찾는 것뿐 아니라 금융의 ‘새판짜기’까지 이뤄져야 하기 때문에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논리다.

전 세계적인 화두가 된 ‘실업률’에 대한 해법도 제시했다. 사전트 교수는 “사람에 대한 동정심으로 실업수당을 늘리면 실업문제를 해결하는 기간이 더 길어진다”며 “단기적 고통을 감수하고 실업자들이 구직에 나서도록 독려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상은/고은이 기자 se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