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도쿄 신오쿠보(新大久保). ‘한류 성지’로 불리는 이곳의 땅값은 3.3㎡당 1000만엔(약 1억4000만원)을 넘는다. 도쿄 전체에서 최근 1년 새 공시지가가 상승한 곳은 세계 최고 높이의 전파탑 ‘스카이트리’가 들어선 스미다구와 신오쿠보 둘뿐이다. 그만큼 유동인구가 많고, 장사가 잘된다.

그중에서도 ‘돈짱’이라는 가게는 독보적이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사람들이 줄을 선다. 주말 저녁엔 1시간 이상씩 기다리는 것도 예사다. 이 가게의 주인인 구철 사장(46)은 도쿄 전역에 10개의 돈짱 점포를 갖고 있다. 작년 매출은 12억엔(약 170억원). 삼겹살이라는 단순한 메뉴 하나로 재팬 드림을 일궈냈다.

잘 곳이 없어 도쿄 시내 공원에서 쪽잠을 자던 22세 부산 청년은 20여년 만에 일본에 사는 한국인 가운데 가장 성공한 ‘사장님’ 반열에 올랐다. 최근 주일 한국대사관이 외교통상부에 한국음식 문화를 알린 유공자로 구 사장을 추천했다. 성공의 비결을 물었다. 듣고 보니 단순했다. 그러나 실천은 어려운 항목들. ‘내 입이 만족하는 음식을 만든다’ ‘눈앞의 이익에 연연하지 않는다’ ‘고객을 감동시켜라’ 등.

‘맨땅에 헤딩’한 구 사장의 20년 일본 생활을 신오쿠보 돈짱 한편에서 들었다. 언젠가 많이 들은 듯한 이야기, 그러나 언제부턴가 뜸해진 ‘밑바닥’ 성공 스토리에 두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일본에 오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집안이 무척 어려웠습니다. 중·고등학교 다닐 때 안 해본 아르바이트가 없었습니다. 고교를 졸업한 뒤 앞일이 막막했습니다. 군대부터 가자는 생각에 해병대를 지원했는데, 두 번이나 떨어졌습니다. 평발 판정을 받았습니다. 방위병으로 출퇴근하면서 남는 시간에 소일삼아 일본어를 조금씩 독학했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일본에 사비 유학을 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제대 후에 곧바로 일본으로 갔습니다.”

▷고생이 많았을텐데.

“1989년에 도쿄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정말 가방 하나 달랑 메고 왔습니다.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 자리부터 찾았습니다. 재일교포가 운영하는 파칭코부터 시작해 택배 배달원, 술집 웨이터 등 돈 되는 일은 다 했습니다. 처음엔 집 구할 돈이 없어서, 도쿄 시내 공원에서 잠을 자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일본어 학원은 빠지지 않고 다녔습니다. 나름 미래를 위한 투자였죠. 그러다 다다미 넉 장 반짜리 단칸방을 구했습니다. 거기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습니다. 둘이 부둥켜안고 자도 좁은 방에 선배 한 명까지 함께 살았습니다. 하하.”

▷원래 요식업을 하고 싶으셨나요.

“처음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1991년엔 늦깎이로 일본의 한 대학 경영학부에 입학했습니다. 변명이지만 아르바이트 하느라 7년 만에 겨우 졸업했습니다. 일본에서 하도 고생을 해 한국으로 되돌아갔습니다. 조그만 무역회사를 차렸습니다. 한때는 잘나갔습니다. 일본 100엔숍에서 팔리는 아기자기한 그릇 등을 가져다 팔았습니다. 그러나 잘된다는 소문이 돌자 금방 대기업 한 곳에서 똑같은 물품을 들여왔습니다. 게다가 외환위기까지 터졌습니다. 결국 회사문을 닫고, 다시 짐을 싸 일본행 비행기를 탔습니다.”

▷삼겹살 가게를 열게 된 계기 같은 게 있었습니까.

“일본에 돌아온 뒤엔 간혹 집에 친구들을 불러모아서 조촐한 삼겹살 파티를 열곤 했습니다. 근데 이게 생각보다 번거로웠습니다. 일단 우리 입맛에 맞는 삼겹살을 구하기 어려웠습니다. 일본인들은 삼겹살을 먹지 않기 때문이죠. 그래서 도쿄에 삼겹살 전문점이 없는지 찾아봤는데, 그 당시만 해도 한 곳도 없었습니다. ‘어라, 이거 한번 해볼까’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처음부터 잘되진 않았을 것 같은데.

“그럼요. 일단 가게 위치가 좋지 않았습니다. 임대료가 싼 곳을 찾다보니 러브호텔이 잔뜩 들어서 있는 이른바 ‘우범지대’ 한편에 가게를 열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낮에도 위험하다고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그러다가 행운의 여신이 찾아왔습니다. 2002년 월드컵이 열린 거죠. 입소문을 타고 한국 회사 직원들이 가게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TV를 보면서 회식하기 딱이잖아요. 게다가 한국팀이 계속 승리하면서 ‘돈짱에서 응원하면 항상 이긴다’는 ‘근거 없는’ 소문까지 돌기 시작했습니다. 돈짱에 날개가 달린 시점이죠.”

▷장사엔 운도 필요한가 봅니다.

“물론입니다. 월드컵 이후에 또 한 번 운이 따라줬습니다. 일본 공중파 방송국인 TBS에 한국 여배우 윤손하 씨가 출연하는 ‘임금님의 브런치(王樣のブランチ)’라는 인기 맛집 소개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여기에 나온 것입니다. 매일 한 곳의 유명 음식점을 소개한 뒤 연말에 최고 인기상을 뽑는 프로그램이었죠. 2003년 한 해 동안 423개의 메뉴가 방송을 탔는데, 연말 대상에 돈짱이 1등으로 뽑혔습니다. 방송에 나간 뒤 본격적으로 일본 손님들이 밀려들었습니다. 어떤 일본 손님은 삼겹살을 먹어보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어, 안 믿어지세요? 진짠데.”

▷맛의 비결이라도 있나요.

“일단 한국과 똑같은 맛을 내도록 노력했습니다. 일본인 입맛에 아부해서는 승부가 안 난다고 생각했습니다. 한국처럼 각종 밑반찬도 풍족하게 내놓고, 무한정 리필도 해줬습니다. 아시겠지만, 일본은 단무지 하나도 돈을 따로 받는 문화입니다. 하지만 돈짱은 손님이 감동할 정도로 잔뜩 퍼주자는 원칙을 지켜나갔습니다. 가격도 대폭 떨어뜨렸습니다. 그 당시 대부분의 한식집 메뉴가 2000엔 정도했는데, 돈짱은 900엔에 상추 등 야채까지 무료로 제공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대박이 터지나요.

“하하. 꼭 그런 건 아니겠죠. 우리 가게의 또 다른 장점은 친절한 종업원입니다. 어느 곳보다도 살갑게 손님을 대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요? 그만큼 좋은 대우를 해줍니다. 업계 최고 대우라고 자부합니다. 종업원들은 대부분 한국에서 들어온 유학생들입니다. 모두 아르바이트와 학업을 병행하는 친구들입니다. 그래서 한국에서 들어올 때 필요한 비행기값이나 학원 수업료, 집세 등은 원할 경우 언제든 미리 가불해줍니다. ”

▷종업원과의 신뢰가 중요하다는 얘기죠.

“저 혼자 생각인지는 모르지만 우리 가게 아이들은 절 믿고 따른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가게의 경쟁력이죠.”

종업원 얘기를 하다 말고 구 사장은 책상 서랍을 열어 신문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작년 7월18일자 도쿄신문. 1면에 삼겹살 접시를 들고 환하게 웃는 구 사장의 사진과 함께 큼지막한 기사가 실렸다. 내용은 동일본 대지진이 터진 뒤에도 돈짱 한 곳만 꿋꿋하게 영업을 계속했다는 것. 다른 가게들은 모두 아르바이트생들이 한국으로 돌아가는 바람에 문을 닫았지만 돈짱은 지진이 터진 다음날에도 홀로 불을 켜고 장사를 했다. 구 사장은 모두 종업원들의 덕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뒤로 일본인 단골 손님들이 부쩍 더 늘었다고 했다.

▷혹시 또 다른 비결은 없나요.

“삼겹살집은 무엇보다 고기맛이 첫째입니다. 그래서 가게 세울 때 일본 전역의 축사(畜舍)를 돌아다녔습니다. 보통 가게 주인들은 그냥 도매상하고만 거래하는데 전 발품을 팔았습니다. 결국 이거다 싶은 곳을 찾았고, 지금도 그곳에서만 고기를 받습니다. 거기 사장님도 의리를 지켜서 지금은 우리하고만 거래를 합니다. 그리고 김치 공장도 하나 따로 차렸습니다. ”

인터뷰 말미에 일본에 불고 있는 ‘한류’가 언제까지 지속될지 물었다. 구 사장은 손사래를 쳤다. 그런 거창한 것은 얘기할 주제가 못 된다고. 그러나 잘될 가능성이 더 크다고 자신했다. “음식과 음악에 대한 습관은 쉽게 버리지 못합니다. 한번 길들여지면 계속 찾을 수밖에 없을 겁니다.” 한류성지를 지키는 ‘삼겹살 전도사’ 구 사장의 희망이다.

도쿄=안재석 특파원 yag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