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덕수 한국무역협회장은 주미대사 시절 미국 민주당 최고 실세 중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 여러 차례 면담 신청을 했다가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 낙담한 그를 도와준 사람은 ‘절친’인 스테판 슈바르츠만 블랙스톤그룹 회장. 세계 최대 사모투자펀드(PEF)를 이끌며 매년 엄청난 기부를 하는 슈바르츠만 회장은 자선행사에 민주당 실세 내외를 초청해 한 회장 부부 옆에 앉게 했다.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과 국무총리를 지낸 한 회장의 ‘글로벌 인맥’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그런 그가 무역인들을 대변하는 무역협회 수장을 맡은 지 3개월이 지났다. 지난달 23일 서울 논현동 한정식 집인 ‘토담골’에서 그를 만났다. 바쁜 한 회장에게 저녁 약속은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점심을 하자고 했다. 이날도 안산상공회의소 강연을 마치고 서둘러 온 모습이었다.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식사 주문도 하기 전에 중소기업에 관한 이야기부터 꺼냈다. 한 20분 정도 흘렀을까. 참석자들의 얼굴에 허기진 표정이 나타나자 그제서야 메뉴판을 들었다. “여기는 꽁보리로 해주는 열무된장비빔밥이 최고입니다.” 도토리묵과 더덕 불고기, 모둠전과 함께 열무된장비빔밥을 시켰다.

▷경제단체장을 맡으시니 어떻습니까.

“2월22일 선임됐으니 이제 3개월이 지났네요. 경제단체장이 기업을 대표하는 자리다 보니 다녀야 할 행사가 많습니다. 기업인들을 많이 만나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 시간이라도 시간이 나면 현장에 간다는 생각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안산에서 오시는 길이지요.

“안산상공회의소가 한 달에 한 번씩 강연을 여는데 오늘이 100회째라고 하네요. 안산 반월공단에는 7800여개 중소기업이 있는데 아무래도 자유무역협정(FTA)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제가 직접 강의를 하겠다고 수락했습니다. 한·중 FTA 등으로 넓어지는 경제 영토를 활용하려면 우선 경쟁력부터 갖춰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땀을 많이 흘리신 것 같네요. 중소기업을 방문해 보시니까 어떻습니까.

“중소기업의 가장 큰 문제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교육기관에서 배출하는 인력과 산업 현장에서 원하는 인력의 미스매치가 심각합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역협회는 물론이고 정부가 많은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중소기업들이 잘 체감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요. 무엇보다 산학협력이 잘 돼야 합니다. 단 중소기업들이 스스로 ‘자학’해서는 안 됩니다. 젊은이들이 오고 싶어할 수 있게 자신있는 모습을 보여줘야 합니다.”

▷산학협력의 본보기는 어떤 게 있을까요.

“안산에 한양대 에리카(ERICA)캠퍼스가 있습니다. 이곳은 140여개 기업이 입주해 있는 학·연·산(Education Research Industry) 클러스터존을 운영하고 있어요. 전담조직 활성화와 실무형 교과 운영을 잘 하고 있습니다. 교육과학기술부가 금속철강과 신소재 분야의 가장 우수한 대학으로 평가할 정도입니다. 제가 여러 곳을 둘러봤지만 여기처럼 잘 되는 곳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사회적으로 고졸 인재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 안산 한국디지털미디어고등학교를 가봤는데, IT(정보기술) 분야 자립형 사립학교로 체육관이나 강당 등 시설이 굉장했습니다. 이 학교 이사장이 개인적으로 투자를 많이 한 것 같더라고요. 창업은 젊었을 때 해야 한다는 것이 그분의 믿음이었습니다. 이 학교에서는 1인 회사를 100여개 창업했다고 합니다. 찬송가 반주를 테너나 소프라노, 바리톤 등 원하는 대로 들려주는 애플리케이션을 만든 것을 보여줬는데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하지만 요즘 그분이 아쉽게 느끼는 점도 많다고 합니다. 이 학교는 창업을 할 수 있는 젊은 인재를 키우는 곳인데, 아직 과거 ‘상업고’처럼 여겨지고 있다는 것이지요. ‘IT과학고’로 인식돼야 인재들이 더 많이 몰릴 텐데 말이죠. ”

제법 심각한 이야기여서 음식에 젓가락을 대기가 약간 민망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이쯤에서 좀 쉬면서 한 회장과 함께 음식을 맛보았다. 도토리묵이나 더덕구이나 처음부터 입맛을 확 당기지는 않았으나 은근한 향이 입가를 맴돌았다. 소박한 맛이 한 회장의 인품을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이 얼핏 머리를 스쳤다.

▷교육 문제에 관심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

“우리 교육에서 우선 대학입시 제도가 바뀌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저는 입학사정관제의 열렬한 지지자입니다. 오랜 공직생활 동안 ‘청탁’이라는 것을 해본 적이 거의 없는데 교육 문제 때문에 한 번 한 적이 있을 정도니까요. 국무총리 시절 입학사정관제 예산이 고작 20억원이라기에 예산실에 ‘총리로서 이것만은 부탁하는데 예산을 10배로 늘려 달라’고 했습니다. 20억원 갖고 도대체 몇 군데나 할 수 있겠냐고 하면서 말이죠. 그랬더니 예산을 늘려주더군요.”

▷중소기업 인력난 개선을 위해 인재풀을 만든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무협에서 은퇴한 분 등을 모아서 리스트를 만들고 있습니다. 외국어 소통에 어려움이 있는 중소기업에 전문 인력을 보내주고 있는데, 그것을 기술이나 경영 분야로 확대하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무협만 나서서는 안 된다는 것이죠. 고용노동부는 물론이고 교과부, 전국경제인연합회 등이 모두 연결된 풀을 만들어야 합니다. 넓게 봐야죠.”

▷FTA 전문가로서 미국산 소고기 수입 논란을 어떻게 보시나요.

“한·미 FTA 논란은 끝난 것 같습니다. 국민들도 옛날 같지 않아요. 미국 광우병도 일부에서 그렇게 바람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잘 안 되지 않았습니까. 학습 효과가 생긴 것이죠. 미국과의 투자자국가소송제도(ISD) 재협상도 문제될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무협, 확실한 서비스 정신으로 무장해야"

한 회장 옆에 작은 수첩 하나가 보였다. 요즘 같은 스마트기기 시대에 웬 아날로그식 노트일까 궁금했는데 꽤 유명한 수첩이었다. 펼쳐 보니 깨알같이 쓴 메모들이 가득했다. 좋은 영어 표현이 많이 담겨 책으로 내면 대박이 날 것이라는 말이 나왔다.

▷메모광으로도 유명하신데요.

“수첩에 중요한 것을 메모한 지 20년쯤 됩니다. 괜찮은 영어 표현을 비롯해 중요한 내용이라고 생각하면 메모를 합니다. 외교에서는 표현이 중요하니까요. 가령 미국 오바마 대통령은 법률이 통과될 때 ‘It becomes law of the land’라고 말하더군요. ‘law of this country’라고 하지 않고요. 사무실에도 집에도 항상 수첩을 곁에 두고 있습니다. 그렇게 메모해둔 노트가 9권 정도 됩니다.”

한 회장이 맨 파란색 넥타이가 식사를 시작할 때부터 계속 눈길을 끌었다. 한 회장의 부인은 서울대 미대 출신 디자이너인 최아영 씨로 한 회장이 매는 넥타이를 직접 디자인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사모님이 만드신 넥타이인가요.

“맞습니다. 여기 몇 개 가져 왔는데 한번 보세요. 괜찮죠? 가격은 3만원 정도로 비싸지 않습니다. 주미대사 시절 선물을 많이 했는데,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미 의회의 한 의원은 너무 좋다며 감사 편지까지 보내왔습니다. 그래서 두 개를 더 보냈더니 제가 참석하는 행사 때마다 그 넥타이를 매고 왔습니다. 한 대사가 선물한 거라고 자랑하면서 말이죠.”

▷얼마 전 한 모임에선 기타 연주를 하셨는데요.

“지난 4월 능동 어린이대공원 야외음악당에서 열린 ‘2012 서울팝스 숲속 음악회’에서 연주한 적이 있습니다. 또 작년 주미대사 시절에는 워싱턴에서 열린 9·11 희생자 추도 공연에서 연주했어요. 유심초의 ‘사랑이여’를 기타 반주로 불렀습니다. 추모식 때 기타를 들고 올라가도 될까 하는 생각도 했는데, 공연이 생각보다 좋았습니다. 청중에게 ‘이렇게 연주할 기회를 주셔서 고맙습니다. 여러분이 전문 연주가와 저의 공연을 비교하면서 느끼게 될 고통을 참아주시는 것도 너무 감사합니다’라고 말하자 큰 웃음이 터졌어요.”

▷즐겨 듣는 곡이 궁금하네요.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을 가장 좋아합니다. 베토벤의 영웅 2악장, 전원 2악장도 즐겨 듣습니다. 한국 곡 중에는 서편제에 나오는 ‘소릿길’을 좋아합니다. 대금과 소금의 연주가 일품입니다. 직원들과 북한산에 가서 함께 들었는데 기가 막혔습니다. 집사람은 너무 처량하다고 하지만요. 음악은 대학교 때 사놓은 레코드판(LP)으로 주로 듣는데, ‘소릿길’ 같은 곡들은 테이프에 녹음해서 듣기도 합니다.”

▷무협을 어떻게 이끌어 나갈 생각이십니까.

“직원들에게 바라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먼저 서비스한다는 확고한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업계의 고충에 잘 반응하고 효과적으로 해결해줄 수 있을지 늘 고민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크게 봐야 합니다. 인위적으로 선을 그어 ‘이건 무협의 일이다, 아니다’라는 식으로 책임을 회피해서는 곤란합니다.”


한덕수 회장 단골집 토담골

인공조미료 쓰지 않는 한정식…‘열무된장비빔밥’ 별미

토담골 논현동점은 서울 논현동 경복아파트 사거리 인근에 있다. 한정식은 물론이고 돌솥에 곱창 냉이 김치 등을 넣어 끓인 김치찌개와 부드러운 돼지수육 굴 김치 배추가 나오는 제육보쌈 등의 메뉴가 인기다.

더덕구이와 불고기, 도토리묵, 해물파전, 모둠전 등도 많이 찾는다. 입맛을 잃기 쉬운 여름에는 꽁보리로 만든 열무된장비빔밥이 제격이다.

인공 조미료 등의 사용을 최대한 자제해 깔끔한 맛을 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좋은 재료에서 좋은 맛이 나온다는 철학’에 따라 대부분의 재료를 산지에서 직접 가져오고 있다.

경기도 퇴촌에서 직접 담근 간장 된장 고추장 김치 등을 내놓는다. 잡채 등의 밑반찬도 푸짐하다. 일본 등 해외 관광객도 많이 찾는다.

가격(점심)은 한정식 2만8000원, 제육보쌈 3만2000원, 돌솥 곱창냉이김치찌개 1만원 정도다. 황토벽과 통나무 느낌의 탁자와 의자로 꾸민 실내는 민속주점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대리 주차도 해준다. (02)548-5121

서욱진 기자 ventur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