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공동체라고 할 때 무엇을 의미하는가. 같은 하늘을 이고 같은 땅을 밟고 있으면 공동체에 살고 있다고 할 것인가. 하기야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다면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가 된다. 가정도 마찬가지다. 부모·자녀가 한 식구라고 해서 밥만 같이 먹고 잠만 같이 자면 가정이 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같은 집에서 자고 같이 밥을 먹는 것만으로 부족하다. 같이 살아도 ‘동상이몽(同床異夢)’속에서 ‘오월동주(吳越同舟)’처럼 산다면, 어떻게 공동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모름지기 공동체라면 같은 하늘을 이고 같은 땅을 밟을 뿐만 아니라 꿈과 기대, 희망도 같이 나누어야 한다. 희로애락을 공유하는 것도 당연하다. 월드컵 4강이 되었으면 같이 즐거워할 줄 알고 같은 민족이 탈북하다 적발돼 짐승처럼 끌려가는 모습을 보았다면, 같이 분노해야 한다. 그래야 공동체에 같이 산다고 할 수 있다. 이 공동체 가운데 특히 민주공화국이라 불리는 정치공동체가 되려면, 기대와 소망은 물론이지만 두려움도 같이 나누어야 한다.

2500년 전 최초의 민주정이었던 아테네를 보라. 그들은 페이시스트라토스라는 참주를 추방한 후 절대 권력을 갖고 일반시민들을 함부로 죽이는 존재가 다시 출현할까봐 몹시 두려워했다. 그 결과 도편투표제를 도입했다. 독재를 할 위험이 있는 인물을 골라 10년 동안 해외 추방을 하는 이 제도는 꽤 효과를 거두었다. 이 참주에 대한 두려움이야말로 아테네인들이 공유하고 있던 두려움이었다. 그런가 하면 로마에서도 마지막 폭군이었던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를 추방하고 왕이 없는 공화정을 만들었다. 그 후 로마인들은 참주의 싹이 보이는 사람들에 대해 매우 엄격한 처벌을 했다. 아테네처럼 해외로 추방한 것이 아니라 원로원이 ‘세나투스 콘술툼 울티뭄’이라는 비상대권을 발동해 처형했다. 집정관의 아들도 추방된 왕과 손을 잡았다하여 처형했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사재를 털어 먹을 것을 나누어준 사람도 독재자가 되려는 기미가 있다고 해 처벌했다. 심지어 농지개혁을 시도했던 그라쿠스 형제까지 독재자가 되려는 야망이 있다고 해 처형해버렸다.

지금 우리나라는 어떤가. 대한민국은 무엇에 대한 두려움으로 살아왔는가. 우리는 현대판 참주의 출현, 일인숭배를 강요하는 북한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두려움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남한 땅에서나마 대한민국을 세웠고 6·25 때 남침한 북한 공산주의자들을 피를 흘려가며 물리쳤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에는 북한체제를 동경하며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있다. 뿐만 아니라 일부는 부정한 방법으로 국회의원이 됐다. 이 주체사상에는 ‘수령론’이라는 게 있다. 공산혁명을 위해서는 혁명의 심장인 수령을 목숨걸고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주사파 종북세력이 북한의 김씨 왕조 3대 세습에 입을 다무는 것도, 북한주민들의 참상에 대해 침묵하는 것도, 또 6·25를 일으킨 김일성의 죄에 벙어리가 되는 것도 모두 다 ‘수령론’ 때문이다. 이런 ‘수령론’을 믿는 사람이라면 아테네에서는 도편추방의 대상이 됐을 것이며 로마 같으면 원로원이 비상대권을 발동해 처벌했을 것이다.

우리 19대 국회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지금 국민들은 몹시 격앙돼 있다. 대한민국에서 달콤한 열매는 다 따먹고 특권은 모두 누리면서도 애국가 4절은커녕 1절도 부르지 못할 정도로 북한수령에 머리를 조아리는 사람들을 국민의 혈세로 먹여 살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또 그들이 접하게 되는 국가기밀을 빼돌리면 어떻게 하나. 그렇다고 해서 아테네처럼 종북파 국회의원을 10년간 해외 추방하라는 것도 아니고 로마처럼 비상대권을 발동해 처형하라는 것도 아니다. 다만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의원만은 하지 못하게 퇴출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그렇게 힘든가.

여당과 야당은 이 문제를 가지고 정략적으로 다툴 일이 아니다. 대한민국의 국회가 참주를 추방했던 아테네나 로마의 원로원을 본받지 못하고 ‘수령론’을 외치는 사람들을 국민의 대표로 인정한다면 어떻게 민주공화국의 국회라고 자처할 수 있으랴. 국회는 어서 빨리 종북파 국회의원을 국회 울타리 밖으로 쫓아내는 결단을 해야 한다.

박효종 < 서울대 교수·정치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