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 속에 다양성을 꾀했다.’

5일 양승태 대법원장이 청와대를 찾아 이명박 대통령에게 임명을 제청한 4명의 신임 대법관 후보에 대한 법조계의 평가다. 이날 제청된 후보들은 모두 고위 법관과 검사장 출신이어서 ‘고도의 법적 소양’과 ‘경험’을 나란히 중시하는 양 대법원장의 성향이 그대로 반영됐다는 게 중론이다.

앞서 대법관후보추천위원회는 교수 출신으로 윤진수 서울대 교수도 추천했지만 최종 낙점되지는 못했다. 대법관이 법원과 검찰의 한계를 벗어나기는 이번에도 쉽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가장 눈에 띄는 후보는 김신 울산지법원장. 어릴적 소아마비를 앓아 다리가 불편한 장애가 있으면서도 이를 극복하고 대법관 후보까지 올랐다는 점에서 성공담의 주인공으로 꼽힐 만하다. 김 원장이 최종 국회 동의까지 받으면 장애를 가진 법조인 중에서 대법관이 된 경우는 김용준 전 대법관 이후 18년 만이다.

이번에도 지역은 배려됐다. 김병화 지검장은 경북 군위, 고영한 차장은 광주, 김신 원장은 부산, 김창석 관장은 충남 보령이어서 영호남과 충청을 아우른 인선이 됐다.

◆파격인사는 없었다

양 대법원장의 성향대로 연공서열의 파괴와 같은 파격 인선은 아니었다는 게 법조계의 평가다. 검찰 몫으로 뽑힌 김병화 인천지검장(15기)을 제외하면 사법연수원 기수가 11기부터 13기까지 고위 법관 순으로 배분됐다. 4명 후보의 연령대도 55세에서 57세 사이다.

특히 여성은 한 명도 보이지 않는 점이 주목된다. 전수안 대법관이 퇴임하면 박보영 대법관이 유일한 여성 대법관이 된다. 고대 법대 출신의 김창석 도서관장 덕에 서울대 일색은 면했지만 비(非)서울대 등 학맥의 다양성에서도 여전히 미흡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박시환 김지형 전 대법관 등 ‘독수리5형제’ 같은 진보성향 후보도 없다. 야당을 비롯한 정치권 일각에서 벌써부터 국회동의 절차에서 “그냥 넘어가지는 않겠다”며 벼르는 이유다. 양 대법원장이 다양성을 꾀했다고는 하지만 고위 법관 등 제한된 틀속에서 제청에 운신의 폭이 좁았기 때문이다.

야권이 대법관 전반의 보수화를 문제 삼으면서 청문회 일정에서 제동을 건다면 가뜩이나 여야가 대치하는 상황이어서 자칫 대법관 임명이 늦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안창호 서울고검장 등 대법관후보추천위원회가 추천한 후보 가운데 이번에 포함되지 않은 후보들은 9월 퇴임하는 2명의 헌법재판관 후임 후보가 될 가능성이 있다.

◆판결로 본 후보들 성향

김창석 법원도서관장은 서울고법 행정1부 부장판사 시절 교육과학기술부가 ‘좌편향 논란’ 교과서를 수정토록 지시한 사건에서 교과부(정부) 손을 들어줘 주목을 끌었다. 수원지법 부장판사로 근무할 때는 삼성전자 소액주주들이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경영진에 대한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하는 판결을 선고했다.

김신 원장은 소외계층 보호에 앞장서 왔다. 국민연금 가입 전에 장애 징후가 있더라도 질병의 대표적 증세가 연금 가입 이후에 나타났다면 ‘가입 중 발생한 질병’으로 봐야 한다고 판결했다. 불법체류 중인 이주노동자가 단속을 피하는 과정에서 다쳤다면 산업재해로 봐야 한다는 판결도 내렸다.

고영한 차장은 서울고법 판사로 있던 1991년 국회의원의 면책특권에 관한 유성환 의원 사건을 판결했는데 ‘근대사법 백년사의 100대 판결 중의 하나’로 선정돼 헌법 교과서에서 인용되고 있다.

김병일 기자 kb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