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들어 세계적으로 대도시의 파워가 커지고 있다. 이에 따라 대도시 외곽 근교도시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대도시와 유기적인 연계를 통해 성장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자칫 대도시의 블랙홀 파워에 눌려 자신만의 독특한 아이덴티티마저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주변 도시로 지역의 부(富)와 자원이 빨려나가는 빨대효과를 극복하고 대도시권의 일원으로 당당하게 성장하고 있는 주변 도시를 찾고 싶다면, 미국 서부 최대 도시인 로스앤젤레스(LA) 근교의 패서디나를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LA 북동쪽의 패서디나는 인구 14만여명의 중소도시다. LA와 가깝지만 나름대로의 독특한 컨셉트를 오랫동안 잘 유지하고 있다. 부유하고 고풍스러우면서도 활력이 넘치는 도시이기 때문이다. 이곳은 남캘리포니아에서 가장 먼저 형성된 부촌이었다. 패서디나는 동부 부자들의 겨울 별장 지역으로 시작했다. 미국 동부와 서부를 잇는 철도가 여럿 부설됐는데, 1887년에는 시카고와 LA 간에 샌타페이 철도가 개통됐다.

철로가 놓이자 동부 해안의 부유한 사람들이 남부 캘리포니아의 따뜻한 태양 아래에서 겨울을 보내려고 몰려들기 시작했다. LA 다운타운에서도 돈을 번 사람들이 출근하기에 좋고 경관도 좋은 패서디나로 옮겨 오기 시작했다. 세계 최초의 고속도로인 ‘패서디나 프리웨이’도 이런 부유층의 수요를 고려해 개발됐다.


#문화와 예술의 도시

부자들이 모이면 그에 걸맞은 문화도 형성되게 마련이다. 패서디나는 태양을 사랑하는 예술가와 보헤미안들이 합류하면서 자연스럽게 화려한 문화 도시로 성장하게 됐다. 이곳은 특히 미국 부자들의 기부 문화가 지역을 어떻게 바꿔놨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공간이다. 패서디나가 문화예술 도시라는 사실은 노턴 사이먼 박물관과 헌팅턴 단지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노턴 사이먼은 유태인 대부호로 1969년 미술관을 건립해 평생 수집해온 전 세계의 걸작 예술품을 전시하고 있다. 패서디나 문화예술 시설의 압권은 헌팅턴 단지다. 철도 재벌인 헨리 헌팅턴은 보자르 건축양식으로 대저택을 지었는데, 1919년 비영리 연구단체 설립을 위해 저택과 정원을 내놓았다. 1904년 조성된 헌팅턴 식물원에는 장미가 만발한 로즈 가든을 비롯해 선인장 컨셉트의 데저트 가든, 커밀리어 가든, 셰익스피어 가든 등 15개의 테마 식물원이 있다.

패서디나는 장미의 도시로도 유명하다. 패서디나 밸리 헌트 클럽은 1890년, 패서디나는 겨울에도 장미가 핀다는 사실을 미국 전역에 알리기 위해 로즈 퍼레이드를 시작했다. 행사는 매년 1월1일 열리는데 가장 멋진 꽃차, 가장 재미있는 꽃차 등 25가지 테마로 나누어 각각 트로피를 수여한다. 또 1922년 미국 중서부와 서부 해안지역 대학 간의 풋볼 경기인 로즈볼 미식축구 결승전 게임을 위해 스타디움을 건립, ‘로즈볼 스타디움’이라고 이름지었다. 미국 최고 전통의 대학 미식축구 대회인 로즈볼 게임이 열리기 전에 이 로즈 퍼레이드가 진행된다.

#지역경제를 받치는 힘

패서디나는 걸으며 관광하기에 쾌적한 도시다. 1880년대와 90년대식의 상점이 늘어선 12개 블록을 복원한 올드 패서디나에서는 옛 정취가 물씬 풍긴다. 거리에는 빅토리아 양식, 스페인 식민지 양식, 아르데코 양식의 건물들이 늘어서 있다. 또 레스토랑, 카페, 바, 부티크, 영화관이 들어서 있다. 위풍당당한 보자르 풍의 시빅센터를 비롯해 건물 하나하나가 탁월한 디자인을 자랑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패서디나에는 세계적인 소수정예 이공계 사립대학이 건재하고 있다. 1891년 설립된 캘리포니아공대로 MIT와는 오랜 맞수다. 캘리포니아공대의 뛰어난 연구 성과는 40개의 연구소를 중심으로 나오는데, 미 국방부로부터 예산을 전액 지원받아 항공우주국과 함께 우주선을 개발하는 제트추진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생물학과 화학 연구로 유명한 베크먼 연구소, 세계 최고 천문대로 유명한 팔로마 천문대, 지진연구소, 해양생물연구소, 수력 및 해안공학 연구소, 라디오 천문 관측 연구소의 거점이기도 하다. 세계의 최고 인재를 끌어모으는 캘리포니아공대의 힘이야말로 패서디나 지역경제의 숨은 저력이다.

#패서디나 도시 경쟁력의 원천

패서디나는 1886년 시로 승격된 이후 지금까지 LA에 흡수되지 않고 자신의 정체성을 잘 유지해 왔다. 다음과 같은 네 가지 노력의 결과다.

첫째, 미국 상류층의 문화를 도시 브랜드로 만들었다. 이 도시의 출발 자체가 동부 사람들의 겨울별장으로 시작됐고, 지금도 부자들이 많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강점으로 만든 것이다. 도시의 건축물, 경관 디자인, 분위기도 고급스러운 이미지에 기여하고 있다.

둘째, 지역 부호들의 기부 문화가 도시 전반에 걸쳐 고급 문화예술을 키웠다. 노턴 사이먼과 헨리 헌팅턴 같은 부호들이 자신의 재산과 수집품을 박물관, 아트갤러리, 도서관, 식물원 형태로 시민에게 흔쾌히 돌려줬다. 이 결과 문화예술은 시민, 관광객이 함께하는 지역의 대표적 자산이 됐다.

셋째, 외지인에게 도시를 알리기 위해 장미를 활용해 지역 브랜드 이미지를 구축했다. 이 지역에서 많이 나는 겨울 장미를 알리기 위해 시작한 장미 퍼레이드는 예상 외로 큰 성공을 거뒀고, 도시의 이미지가 한껏 올라갔다. 또 세계적인 이목을 끄는 미식축구 경기장의 이름도 로즈볼 스타디움으로 정해 일관된 브랜드 전략으로 장미 도시 이미지를 강화했다.

넷째, 도시의 컨셉트에 맞게 캘리포니아공대를 비롯한 소수정예 대학과 연구기관을 유치해 고급 인재를 끌어오고 도시의 정체성을 유지했다. 과학기술 분야 소수정예 교육을 한다는 지역 대학의 비전이 과학기술 분야의 탁월한 교수를 불러오게 했고, 이렇게 모인 훌륭한 교수와 학교의 명확한 비전을 보고 세계의 우수한 학생들이 몰려들자 여기저기서 기금이 쇄도하는 선순환이 일어났다.

물론, 이런 요인 외에도 패서디나 가까이에 LA라는 대도시가 있다는 사실이 매우 중요하다. 그 덕분에 이 도시는 고급 주택지를 활용해 우수한 인력, 학교, 연구소를 유치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패서디나가 특화된 전략으로 대도시의 틈바구니 속에서 자신만의 정체성을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정리=이주영 한경아카데미 연구원 opeia@hankyung.com




김민주 <리드앤리더 대표 mjkim8966@hanmail.net>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시카고대 경제학 박사 △한국은행, SK그룹, SK에너지, 더콘텐츠컴퍼니 대표, 유달리커뮤니케이션즈 대표 △저서 ‘로하스경제학’ ‘커져라 상상력, 강해져라 마케팅’ ‘성공하는 기업에는 스토리가 있다’ ‘시티노믹스’ △역서 ‘깨진 유리창 법칙’ ‘B2B 브랜드 마케팅’ ‘지식경제학 미스터리’ ‘트래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