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오후의 인터뷰라니, 오랜만이다. 박병원 은행연합회장은 인터뷰 약속은 흔쾌히 ‘OK’ 했지만, 시간을 잡는 데는 다소 어려움이 있었다. 6월 중에는 점심·저녁 약속이 꽉 차 있다고 했다. 가느다란 눈썹이 잠깐 송충이처럼 찌푸려졌다가 금세 “그렇다면 일요일은 어떠냐”고 제안했다.

장소를 잡는 데는 3초도 걸리지 않았다. ‘맛있는 만남’ 초대라고 하자 박 회장은 단박에 두 곳을 추천했다. “로씨니 아니면 톰볼라. 로씨니는 내 강북 구내식당이고, 톰볼라는 강남 구내식당이거든.” 둘 다 양식집이다.

일요일 오후 6시,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 로씨니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탈리아 음식점인 로씨니는 정부 관료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박 회장은 이탈리아 음식점에 관한 기준이 확실했다. “티라미수(치즈와 초콜릿 소스를 사용한 케이크 형태 후식)를 잘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집 티라미수가 아주 맛있어요. 즙이 풍부하고.”

맞춤한 시간에 들어선 박 회장은 하늘색 빵모자(헌팅캡)를 쓰고 있었다. 빵모자도 빵모자이지만 모자 왼편에 붙은 물고기 장식이 더 눈길을 끌었다. 복어 모양이었다. 뜬금없이 웬 복어? “우리 딸 전공이 디자인인데, 이게 아빠랑 제일 닮은 물고기라면서 비즈공예로 만들어준 거예요.” 박 회장의 자랑 섞인 설명이었다.

목에는 넥타이 대신 유리로 만든 루프타이를 걸었다. “꼭 넥타이를 해야 하는 자리가 아니면 루프타이로 대신한다”는 그는 “보통 루프타이 장식은 나무나 금속이 많은데, 일본 홋카이도엔 유리로 만든 루프타이가 많아서 갈 때마다 하나씩 사온다”고 했다.

◆“천성부터 자유인”

자리에 앉자 주인장이 우선 브루스케타(Bruschetta)를 전채로 내왔다. 바게트 빵 위에 토마토 샐러드 등을 얹어 먹는 음식인데, 로씨니는 아주 얇고 바삭한 피자빵을 이용하는 점이 독특했다. 따로 주문하는 과정은 없었다. 박장연 로씨니 대표는 “회장님이 오실 때마다 늘 주문하는 음식이 있는데, 대개 여러 음식을 시켜서 가운데 놓고 손님들이 나눠 드신다”고 했다.

박 회장은 은행연합회장이지만 이날 만남에서 은행 얘기는 많이 하지 말자고 했다. 그러마고 수락한 이유는 그것을 빼고도 들을 이야기가 많다고 생각해서다.

그는 엘리트 경제 관료로 오랜 시간을 지냈다. ‘장관을 할 것’이라던 후배들의 예상을 깨고 ‘공성신퇴(功成身退·성공한 사람은 물러날 때를 알아야 한다)’를 말하며 어느날 재정경제부 차관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우리금융지주 회장을 지냈고, 이명박 정부 들어 경제수석으로 발탁됐지만 감사원에서 지주 회장 시절 일을 문제 삼자 또다시 물러났다. 미국과 중국의 대학에 몸담았고 아프리카 등 개발도상국에 개발 경험을 전수하기도 했다.

경기고와 서울대 법대 출신인 데다 흔한 말로 ‘능력치’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그가 이렇게 오르락내리락 삶의 풍파를 겪는 것은 바닥부터 자유로운 천성, 소신을 굽히지 않는 강직함 때문이라는 평이 많다.

특히 2009년 1월 경제수석에서 물러날 때에 관해서는 지금도 뒷말이 무성하다. 그는 이날 여러 차례 이와 관련한 질문이 나왔지만 언급을 피해갔다. 대신 로씨니 특유의 블랙 올리브를 소스로 얹은 라비올리와 줄기콩 샐러드가 얼마나 맛있는지를 열심히 설파했다.

◆“삶을 즐기는 법을 가르쳐라”

옛 경제기획원 출신 관료 중 천재 소리를 듣는 이들이 여럿 있다. 하지만 천재도 여러 가지다. 박 회장은 정보 습득력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천재로 꼽힌다.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중국어 일본어 러시아어 등 9개 국어를 할 수 있다고 스스로 자신할 정도다. “대학 때 이탈리아의 산레모 가요제가 끝나면 ‘빽판’(불법 복제 음반)이 쫙 나돌았는데, 가사를 못 읽는 게 싫어서 이탈리아어를 익혔다”는 식으로 보통 사람의 기를 폭 죽인다.

하지만 막상 만나면 ‘천재’보다는 편안한 이웃집 아저씨 느낌이 더 강하다. 운전기사가 딸린 차량을 지급받는 자리에 있을 때도 직접 운전을 즐기고, 바쁜 경제수석 시절에도 종종 산에 올라 꽃 사진을 찍곤 했던 소탈한 성품이 배어 나와서다.

박 회장은 사람을 만날 때 자그마한 선물을 주곤 한다. USB다. 그 안에 2400여장의 사진이 들어 있다. 박 회장이 미국과 우리나라에서 직접 찍은 꽃 사진이다. 함박꽃, 오렌지꽃, 얼레지꽃, 능소화 등 온갖 꽃이 그 안에 들어 있다. 뛰어난 기술은 없지만 찍는 이의 애정이 담뿍 느껴지는 사진들이다.

그의 집은 작은 화원을 방불케 한다. 곳곳에서 나무의 씨앗을 받아다 집에서 싹을 틔워 묘목으로 키워내는 그의 솜씨 때문이다. “우리집 소나무는 울진 소광리 출신이고, 차나무는 보성 한국다원, 동백꽃은 선운사, 느티나무는 광화문 정부1청사 출신”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소나무 씨앗을 본 적 없지요? 아주 작은 1.5㎜ 정도의 잣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게 딱딱한 껍질을 모자처럼 쓰고 싹이 올라와서 어느 순간 좌라락 솔잎이 펼쳐지는 모습을 보면 감동입니다.”

은행연합회장으로서 금융노조와 만날 때도 산행을 택한다. 산행을 하면서 자연스레 이런저런 꽃이며 나무 사진을 찍는다. 그러다 보니 노조 측에서 꽃이 많은 길을 먼저 제안하기도 한단다. 사진기는 오래 된 소니 카메라를 애용한다. “렌즈통이 돌아가는 것이 마음에 들어 계속 쓰고 있는데, 하도 오래 돼 고장이 난 뒤 남대문에 가 고치면서 예비 용도로 똑같은 중고 카메라를 하나 더 샀다”고 했다.

◆“서비스업에서 경제성장 해답 찾아야”

꽃과 나무에 대한 사적인 이야기는 교육과 경제에 관한 그만의 ‘큰 그림’으로 옮아갔다. 메뉴도 어느새 주요리인 양갈비와 갑오징어 먹물 스파게티로 넘어갔다.

“삶을 즐기는 법도 ‘가르쳐야’ 합니다. 내가 꽃과 나무를 좋아하는 것은 사진을 찍던 아버님의 영향으로 국민학교 5학년 때부터 꽃 사진을 찍었던 이유도 있지만, 중학교 때 식물반을 한 것도 작용했거든요. 주변의 즐길 만한 것들에 눈을 뜨게 하는 교육을 해야죠.”

그는 그것이 우리 경제 발전의 밑거름이 된다는 지론도 펼쳤다. 제조업이 일자리를 창출할 능력이 크게 감소했으므로 서비스업에서 해답을 찾아야 하는데, 삶을 즐기는 사람이 늘어 그림 한 장, 공연 한 편이라도 더 즐기게 돼야 서비스업이 활성화한다는 얘기다. “뮤지컬 캣츠를 할 줄 알아야 캣츠를 즐길 수 있나요? 작곡을 몰라도 베르디의 레퀴엠을 좋아할 수 있습니다.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 예술인데, 우리 예술 교육은 ‘직접 하는 것’에 자꾸 방점을 둡니다. 나는 그게 아니라 듣는 것, 보는 것, 즐기는 것에 90% 정도 비중을 둬야 한다고 봅니다.”

특히 서비스업을 강조하는 이유에 대해선 제조업 고용 부진을 원인으로 지목했다.

“제조업에서 1년에 6만개씩 일자리가 없어지고 있습니다. 그런 추세가 시작된 것이 1996년입니다. 2009년 일자리가 7만개 줄었다고 모두가 큰일 났다고 했는데, 사실은 정부가 노인요양보험을 시행하면서 이 무렵 사회복지 분야에서 3년 연속 해마다 15만~16만개씩 일자리가 생겼습니다. 또 2009년에 공공행정 인턴으로 일자리 19만개를 일시적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합해서 연간 34만개를 인위적으로 만들었는데도 7만개가 줄었으니, 실제로는 40만개 이상 일자리가 줄었다고 봐야 합니다.”

"내수·서비스 산업 중심으로 경제운용해야"

열변은 계속됐다. 답답한 마음을 대변하듯 담배가 등장했다. 끊었다가 2010년 중국 톈진대학에 공부하러 갔을 때 ‘전 인민 흡연 체제’인 것을 보고 다시 이어 붙였다고 했다.

“젊은 층의 관심사는 복지도 물가도 아니고 무조건 취직인데, 청·장년층을 위한 좋은 일자리는 별로 늘어나지 않는 이 상황에서 복지나 물가안정을 우선하다 보면 결국 고용 창출의 주름살이 늘어나는 결과만 낳게 됩니다. 고용 없는 성장에서 사회복지를 강조해 봐야 세수가 늘어나지 않으니, 그리스같이 되자는 이야기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는 “내수·서비스산업으로 경제운용의 방향을 바꿔야 한다는 이야기가 10년 전부터 나왔다”고 회고했다. “언론에서도 2001년부터 중국·일본 관광객 증가에 대비해야 한다고 얘기했는데 아직도 호텔이 부족하다고 하는 게 문제입니다. 지금이라도 서둘러야 됩니다. 이 분야에서 한걸음이라도 나아간 것이 뭐가 있습니까.”

은행들에 대한 과도한 사회공헌 요구에 대해서도 속내가 슬쩍 비어져 나왔다. 박 회장은 “은행연합회가 마지막으로 그림을 산 것이 1996년”이라며 “16년 만에 내가 와서 그림 두 장을 샀다”고 했다. “은행들이 과거에는 국전 그림을 몇 장씩 사주는 관례가 있었습니다만 지금은 없어졌어요. 문화예술 발전에 더 기여해 주면 좋겠는데 하라는게 워낙 많으니까 거기까지 닿지 않는 겁니다. 작년에 이익이 많이 났다고 해서 올해 사회공헌을 1조원으로 늘리라고 하는데 올해 수익이 줄어들면 은행들이 부담스러울 것 같습니다.”

박 회장은 “한국에서 돈을 벌면 사회공헌을 많이 하라고 하고, 배당 많이 하지 말라고 하면 누가 한국에 투자하겠느냐”며 “한국에 투자하고 싶게 만드는 그 노력이 충분한지 되돌아봐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국민들은 일자리가 없으니까 사회복지를 원하는 것이지, 진짜로 원하는 것은 일자리가 아니냐”며 “복지 확대를 먼저 하면 일자리라는 비용이 따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양극화에 대한 논리도 간명했다. “투자가 안 되는데 일자리가 만들어지는 경우를 본 적이 없고, 일자리가 안 되는데 소득분배가 개선되는 것을 본 적이 없다”는 얘기다.

끝날 무렵 자녀들 이야기를 물었다. 그는 1남1녀를 두고 있는데 둘 다 영국에 있다. 아들은 그가 한때 근무했던 유럽부흥개발은행(EBRD)에서 일하고, 딸은 영국왕립예술학교(RCA)에서 최근 한국인 최초로 교수가 됐다고 했다. “딸 결혼을 잘 시켜야 하는데…. 이건 골프에서 마무리 퍼팅이 중요한 것과 같은 거예요. 주변에 누구 사람 없나요? 인터뷰 나오면 조금 도움이 될라나?” 그가 허허 웃었다.


박병원 회장의 단골집 로씨니

마늘로 냄새 잡은 양갈비구이…먹물 파스타 '일품'

서울 재동 지하철 3호선 안국역 2번출구 헌법재판소 정문 앞에 있는 ‘로씨니’는 국내에서 손꼽히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이다. 1997년 동부이촌동에서 문을 열었지만 임대료 문제로 2004년 삼양사 재동사옥 1층으로 자리를 옮겼다. 고(故) 김상홍 삼양사 회장이 로씨니의 단골인 게 인연이 돼 삼양사 사옥에 둥지를 틀었다는 후문이다.

로씨니의 대표 메뉴는 양갈비 석쇠구이(3만7000원)다. 마늘과 타임(향식료)으로 맛을 내 누린내가 없고 양갈비 특유의 맛을 잘 살렸다는 평이다. 날치알을 곁들인 갑오징어 먹물 스파게티(2만1000원)도 인기 있는 메뉴다. 신두병 전 이탈리아 대사가 베니스의 그 어떤 먹물 스파게티보다 맛있다고 평가하면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생면의 쫄깃함이 더해져 감칠맛이 난다. 여러 가지 신선한 해산물을 조개국물에 담가 약한 불에 은근하게 우려낸 해산물 수프(9000원)도 손님들이 즐겨 찾는 메뉴다. 파스타 세트가 2만6000~2만9000원, 스테이크 코스는 점심 3만8000~5만원, 저녁 4만5000~6만원이다. (02)766-8771

이상은 기자 se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