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의관들은 부상자들의 붕대를 갈지도 못했다. 붕대를 갈기 위해 장갑을 벗는 순간 손이 곧바로 동상에 걸리기 때문이었다.… 침낭 속에 들어가 잠을 자던 해병들은 지퍼가 얼어붙어 나오지 못하는 사이에 중공군의 총검에 찔려 죽었다.” “혹독한 상황 속에서도 그들은 불굴의 투혼을 발휘했다. 구호소 텐트 안에 있던 부상병들은 ‘나가서 싸울 사람이 필요하다’는 말에 비틀거리면서도 총을 들고 나가 싸웠다. 대부분 돌아오지 못했다.”

사라져간 영웅, 끝나지않은 전쟁

6·25전쟁에 참전했던 마틴 러스 전 카네기멜론대 교수가 쓴 《브레이크아웃》에 나오는 증언이다. 1950년 겨울, 개마고원 장진호 지역으로 진격한 미 해병대 1사단은 전력의 10배가 넘는 12만여명의 중공군 9병단(7개 사단)과 17일 동안 사투를 벌였다. 미군은 이 전투에서 2500여명의 전사자와 5000여명의 부상자를 냈지만, 적군 사상자는 4만명에 육박했다. 궤멸적 타격을 입은 중공군은 남하에 제동이 걸렸고, 국군과 유엔군은 전열을 수습해 반격에 나설 시간을 벌었다. 10만여명의 북녘 민간인들이 자유를 찾아 ‘원조 탈북’을 단행한 ‘흥남철수’도 장진호 전투의 고귀한 선물이었다.

“조국은 그들이 전혀 알지도 못한 나라, 한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조국의 부름에 응한 아들 딸들에게 경의를 표한다(Our nation honors her sons and daughters who answered the call to defend a country they never knew and a people they never met).”

미국 수도 워싱턴의 ‘한국전쟁 참전용사 기념공원’에 새겨져 있는 글귀다. 미 국방부 자료에 따르면 미국은 6·25전쟁 동안 30만2483명의 군인을 파병했다. 그 중 5만4246명이 전사하고, 8177명이 실종됐으며, 7140명이 포로로 잡혔고, 10만3284명이 부상 당했다.

미국 외에도 영국 1만4198명, 캐나다 6146명, 터키 5455명, 호주 2282명, 태국 2274명, 필리핀 1496명, 뉴질랜드 1389명, 에티오피아 1271명, 그리스 1263명, 남아프리카공화국 1255명, 프랑스 1185명, 콜롬비아 1068명, 벨기에 900명, 네덜란드 819명, 룩셈부르크 48명이 대한민국을 위해 총을 들었다. 이들의 절반 이상이 전사하거나, 실종되거나, 포로로 잡히거나, 중상을 입었다.

생존 군인들 가운데 상당수는 아직도 악몽과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1951년 2월 지평리 전투에서 중상을 당한 프랑스의 세르주 아르샹보 씨는 영국 BBC와의 인터뷰에서 “지금도 눈을 감으면 바로 옆 동료가 적의 로켓포를 허리에 맞아 몸이 두 동강 나던 모습이 떠오른다”며 “61년째 아침 저녁으로 한 움큼씩의 신경안정제와 진통제를 먹지 않고는 버틸 수 없다”고 호소했다.

가슴 저미는 “내인생 최고의 1년”

이들의 희생은 우리가 아직도 갚지 못한 빚으로 남아 있다. 한국 경제는 전쟁의 잿더미를 딛고 비상했지만, 혈맹들이 지켜준 자유와 평화의 참된 의미는 희석돼가고 있다. 대한민국의 상징이 국회에까지 진출한 종북주의자들로부터 대놓고 모욕 당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영국군 참전용사 프레스턴 벨 씨가 《마지막 한발》의 저자 앤드루 새먼에게 털어놓은 회고는 그래서 가슴을 시리게 한다. “나는 내 인생의 1년을 한국에 줬어. 개인적으로는 잃어버린 1년이었지. 하지만 한국인들은 내가 준 그 1년으로 놀랍도록 번성한 신천지를 만들어냈더군. 한국인 여러분, 나에게 감사하지 마십시오. 내 인생을 가치 있게 만든 건 여러분입니다.”

이학영 편집국 부국장 ha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