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 힐링 여행…빙하가 할퀸 자리, 선물같은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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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이굽이 협곡 사이 피오르 속살, 푸른 바다와 울창한 숲의 협주곡
배가 산으로 가면 참 멋있구나…
중세시대로 낭만여행 베르겐, 뭉크의 절규를 만나는 오슬로
신비롭게 저무는 북유럽의 하얀 밤
배가 산으로 가면 참 멋있구나…
중세시대로 낭만여행 베르겐, 뭉크의 절규를 만나는 오슬로
신비롭게 저무는 북유럽의 하얀 밤
푹푹 찌는 더위에 팍팍한 일상의 무게까지 얹어져 어깨가 축 처질 때, 누군가와의 갑작스런 이별에 가슴이 뻥 뚫린 듯 아려올 때…. 어떤 이는 친구를 만나 술잔을 기울이고 어떤 이는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책으로 위안을 얻는다. 그래도 가장 확실한 위로는 여행이다. 게다가 목적지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행복지수 2위 국가, 노벨평화상의 도시, 빙하가 만든 대자연의 걸작 피오르(fjord)가 펼쳐지는 곳이라면 이보다 괜찮은 위로는 없을 것이다. 종북(從北)과 힐링(healing·치유)이란 단어가 핫이슈인 요즘, ‘북으로(nor) 가는 길(way)’ 노르웨이로 힐링 여행을 떠난다.
◆중세 부둣가의 낭만, 베르겐
뾰족한 지붕에 알록달록한 목조건물 10여채가 서로 어깨를 기댄 채 나란히 붙어 있다. 잘 꾸며놓은 중세시대 테마파크 같은 이 거리가 노르웨이 제2도시 베르겐(bergen)의 대표적 풍경인 브뤼겐(bryggen)이다. 항구라는 뜻의 브뤼겐은 14~17세기 북해 발트해 연안도시 교역조합인 한자동맹의 독일 상인들이 사무실과 숙소, 창고로 쓰던 곳이다. 지금 남아 있는 규모는 전성기 시절의 4분의 1 정도. 베르겐을 수차례 휩쓴 대형화재로 잃어버릴 뻔한 건물들이지만 그때마다 똑같은 방식으로 복원돼 꿋꿋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비록 몇 채는 다리 힘이 풀린 듯 옆 건물에 몸을 맡기고 있지만 말이다. 197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뱃사람들의 생기와 한자 상인들의 치열한 흥정 소리로 시끌벅적했을 이곳은 이제 고급 요트와 크루즈선이 정박하는 낭만 항구다. 작은 어시장 거리, 노르웨이가 자랑하는 싱싱한 연어와 해산물에 군침이 돈다. 킹크랩 1kg 10만원, 연어 샐러드 한 접시 4만원, 샌드위치 1만6000원. 어이쿠! 치안은 안심할 만해도 물가는 ‘무서운’ 나라다.
베르겐 시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플뢰엔(Floyen)산에 오른다. 걸으면 30~40분, 푸니쿨라로 불리는 경사진 케이블카를 타면 7분 만에 정상 도착이다. 해발 320m. 아늑하게 도시를 내려다볼 수 있는 최적의 높이다. 그림엽서 같은 풍경이 눈앞을 꽉 채운다. 1년에 280일은 비가 내리는 도시라는데 청명한 햇살을 만난 건 정말 행운이다. V자 모양으로 손가락을 편 것처럼 자리잡은 협만(峽灣)에 촘촘히 박혀 있는 낮은 건물들. 베르겐이 고향인 작곡가 그리그는 매일 이 풍광을 보며 페르귄트 모음곡의 음표를 채워갔겠지….
◆한 폭의 수묵화를 닮은 피오르
두께가 2~3㎞나 되는 빙하는 노르웨이 해변에 깊숙한 흔적을 새기고 떠났다. 육중한 얼음덩이가 세차게 떠내려갈 때 땅의 살점도 함께 떨어져 나갔다. 거대한 숟가락으로 있는 힘껏 파낸 듯한 U자 모양의 계곡이 생겼고, 빙하가 녹은 물이 바닷물과 함께 차올라 메워진 것이 바로 학창시절 단골 시험문제였던 피오르다. 가파른 절벽 사이 워낙 좁고 긴 해안이기에 산을 휘감아 흐르는 강물이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진다. 특유의 바다 냄새도 없다. ‘저 물은 과연 짤까’하는 쓸데없는 의구심이 잠시 스쳐간다.
노르웨이 5대 피오르(예이랑에르, 노르, 송네, 하르당에르, 뤼세) 중 가장 유명한 송네 피오르. 해안선 길이가 무려 204㎞다. 위로 보이는 거대한 절벽 높이가 1000~1500m, 물 아래 감춰진 부분이 최고 1300m나 된다. 작은 도시 구드방엔에서 출발하는 페리에 올라탄다. 송네 피오르의 지류 가운데 하나인 내뢰 피오르(Nærøyfjord)와 아울란드 피오르(Aurlandsfjord)를 둘러보는 ‘노르웨이 인 어 너셀(Norway in a Nutshell)’ 패키지다. 거대한 절벽, 폭포, 만년설, 숲속의 그림 같은 집까지…. 빙하가 할퀴면서 남긴 선물 같은 풍경의 알짜만 뽑아 놓은 듯한 코스다. 굽이굽이 협곡 사이 피오르의 속살은 경이롭다. 시리도록 푸른 바다와 울창한 숲의 협주곡이 유유히 흐른다. ‘배가 산으로 가면 이렇게 멋있구나’ 감탄하는 사이, 비경을 설명하는 한국어 안내 방송이 반갑다.
페리가 멈춘 곳은 플롬 역이다. 해발 2m인 이곳에서 해발 886m 뮈르달 역까지 산악열차를 타고 달린다. 로맨틱 열차라는 애칭답게 기차(플롬스바나)는 낭만을 안다. 수문을 연 댐처럼 엄청난 물을 토해내는 쿄스폭포 앞에 멈춰선다. 내려서 이 기막힌 풍경을 사진기에 담으라는 배려다. 세차게 부서진 폭포 물살이 튀어 온몸이 금세 촉촉해진다.
불과 20㎞ 거리지만 터널만 20개나 이어지는 지그재그 절벽 길을 오르느라 기차는 거의 1시간을 달린다. 최고 경사 55도. 산이 높아질수록 바퀴와 레일은 ‘꺽꺽~’ 앓는 듯한 마찰음을 내지른다. 있는 길을 달리는 것도 힘겨워 보이는데 이 철로를 만든 사람들은 어땠을까. 1923년 시작한 20㎞ 단선궤도 공사는 20년이 지나서야 겨우 끝났다. 20개 터널 중 18개를 기계 한 번 쓰지 못하고 맨몸으로 파냈다. 1m 전진하는 데 한 달 넘게 걸렸다고 한다.
드디어 종착역인 뮈르달이다. ‘초여름’에 출발한 기차는 1시간 만에 ‘겨울’에 도착했다. 샌들을 신고 나선 6월의 여행에서 만난 하얀 눈밭. 빼꼼히 나온 발가락이 멋쩍다.
◆뭉크와 입센을 만나는 오슬로
오슬로 중앙역을 나오자마자 생각지도 못했던 바다가 보인다. 바이킹의 후예들이 사는 나라의 수도답다. 빙하를 본떠 2008년 새하얀 대리석으로 지은 오페라하우스를 뒤로하고 ‘오슬로의 명동’같은 칼 요한 거리로 향한다. 중앙역부터 왕궁까지 약 1.5㎞에 이르는 노르웨이 최대 번화가다. 거리 이름은 스웨덴-노르웨이 연합왕국을 다스렸던 칼 요한 14세의 이름을 따서 붙였다. 오슬로대학, 국립극장, 국립미술관, 국회의사당, 대성당까지 오슬로의 주요 건물이 이 거리에 모여 있다.
‘인형의 집’을 쓴 극작가 헨리크 입센(1828~1906)이 매일 점심시간에 들렀다는 ‘그랜드 카페’도 빼놓을 수 없는 명소. 그가 썼던 접시, 와인 잔, 검은 모자가 얹혀진 테이블이 입센의 ‘영원한 지정석’으로 남아 있다. 1895년 이 카페에 앉아 있는 입센의 모습을 그렸던 에드바르 뭉크(1863~1944). 두 예술가는 인생과 예술을 뭐라고 논했을까. 자주 만나진 않았어도 서로가 서로의 작품에 영감(靈感)이 됐으리라.
결핵으로 어머니와 누나를 잃고 괴팍한 아버지 밑에서 자라면서 고독과 절망, 죽음의 공포에 괴로워했던 뭉크. 아픈 과거는 ‘절규’라는 걸작을 낳았다. 뭉크는 4장의 절규를 남겼고 그 중 한 점은 지난 5월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사상 최고가인 1억1990만달러(약 1355억원)에 낙찰됐다. 몸값 비싼 그림이지만 오슬로 국립미술관에서 공짜로 감상할 수 있다.
그런데 유독 이 그림만 투명한 패널이 덮인 채 도난 경보기가 달려 있다. 1994년 2월12일 새벽, 창문을 뜯고 ‘절규’를 훔쳐간 도둑들이 “허술한 보안에 감사한다”라는 쪽지까지 남겼던 ‘굴욕’도 모자라 2004년엔 관람객들이 지켜보는 대낮에 또다시 강탈당한 ‘쓰라린 악몽’을 격은 탓이다. 천장엔 ‘절규’만 24시간 노려보는 CCTV가 있고 뭉크의 방 입구엔 직원 한 명이 허리춤에 총을 찬 채 눈을 번뜩이고 있다. 다른 방에 전시된 피카소, 세잔, 마네 그림과 달리 사진 촬영도 금지다.
매년 12월10일 노벨평화상이 열리는 오슬로 시청으로 발길을 옮긴다. 빨간색 벽돌로 네모 반듯하게 지어져 ‘공무수행’에 딱 어울리는 외관이지만 안으로 들어서니 사방이 색감 좋은 벽화다.
밤 11시가 넘어가는데도 여전히 햇살의 여운이 남아 있다. 시청 앞 해안을 따라 이어지는 ‘아케르 브뤼게(Aker Brygge)’엔 긴긴 여름 밤을 즐기려는 낭만파들이 가득하다. 항만 창고지역을 재개발해 대형 쇼핑몰과 카페, 레스토랑, 고급 주택가로 변신한 거리는 건축 디자인 경연장 같다. 해안가를 꽉 메운 요트와 빙하를 담아온 듯 시원한 바람, 오슬로인들의 여유로운 웃음소리가 푸르다. 북유럽의 하얀 밤(白夜)이 신비롭게 깊어간다.
◆ 여행 팁
생수 한 병 5000원…치안은 걱정 없어도 물가는 '무서워'
노르웨이로 가는 직항편은 없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이나 핀란드 헬싱키를 경유해 가는 게 비교적 빠른 길이다. 노르웨이는 유럽연합(EU) 국가가 아니라서 유로화가 통용되지 않는다. 사용하는 화폐는 크로네(nok). 1크로네는 약 200원이다. 치안은 안심할 수 있어도 물가는 ‘무서운’ 노르웨이다. 생수 한 병에 5000원, 식당에서 파는 500㎖ 생맥주 한 잔 2만원, 택시 기본료는 8000원으로 15분 정도 타면 약 8만원의 요금이 나온다. 오슬로패스나 베르겐패스를 사는 게 유리하다. 대중교통은 물론 미술관 박물관까지 공짜로 이용할 수 있다.세금이 많기로 유명한 나라지만 식당이나 상점에서 부가세를 따로 받는 일은 없다. 유럽에선 흔한 팁 문화도 없다. ‘면세’ 표시가 된 곳에서 구입한 금액이 315크로네(약 6만3000원)를 넘으면 출국할 때 공항에서 세금을 돌려받을 수 있다. 전기는 220V. 수돗물은 그냥 마셔도 될 만큼 깨끗하다. 한여름이라도 피오르의 아침 저녁엔 쌀쌀한 기운이 감돈다. 긴소매 옷과 가볍고 작은 우산은 필수. MP3에 비틀스의 노래 ‘노르웨이의 숲(norwegian wood)’을 담아간다면 센스 만점이다. 비록 노랫말 속의 ‘wood’란 단어가 숲이 아니라 가구를 뜻한다는 해석이 있을지라도.
베르겐·오슬로=이명림 기자 jow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