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isure&] 녹음이 출렁인다…섬진강이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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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하동 나들이
바야흐로 여름 정취가 완연하다. 산하가 녹색으로 출렁대는 이즈음, 경남 하동 땅을 찾으면 몸과 마음에 에너지를 가득 채워 올 수 있다. 언제나 흐름을 멈추지 않는 섬진강. 고운 모래가 많아 모래가람, 다사강, 두치강으로 불리기도 했던 섬진강은 하동의 얼굴이자 여행 1번지다.
○마를 날이 없는 여름 섬진강
구례를 거쳐 섬진강을 따라 하동으로 들어간다. 길 양쪽으로 펼쳐진 산과 들이 참으로 넉넉해 보인다. 그 모습이 푸른 섬진강과 절묘한 대비를 이룬다. 한 폭의 멋진 산수화! 구례에서 하동까지 200리 길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다. 전북(진안) 전남(곡성·구례) 경남(하동)의 3도를 거치는 섬진강 500리 길은 그래서 누구나 한번쯤 가보고 싶은 곳이다. 섬진강은 긴 가뭄에도 마를 날이 없다. 강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꿈틀대는 생명의 소리가 들린다. 얼마나 많은 생명체들이 저 강을 안식처로 삼아왔을까?
그렇게 섬진강을 곁에 두고 달린 지 20여분. 상설시장으로 변한 화개장터를 둘러보고 쌍계사로 간다. 화개장터와 쌍계사를 잇는 길은 봄이면 벚꽃 터널로 변하지만 지금은 녹색 터널이다. 바람에 팔랑이는 나뭇잎들이 싱그럽기 그지없다. 젊은 연인들이 이 길을 함께 거닐며 결혼을 약속한다 해서 ‘혼례길’ 또는 ‘혼인길’이라 불린다던가.
호젓해서 좋은 쌍계사길 좌우로는 찻집들이 늘어서 있다. 화개천을 끼고 들어앉은 근사한 전통다실에 들어가면 아침 이슬을 먹고 자란 하동 야생차를 음미할 수 있다. 고요한 마음으로 마주앉아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다 보면 여행의 또 다른 재미를 발견하게 된다. 쌍계사는 차와 인연이 깊다. 절 입구에 차 시배지가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시배지 아래 차문화센터와 악양면사무소 앞 매암차문화박물관에서 녹차 제조 과정을 직접 보고 하동 차를 시음할 수 있다.
신흥마을에서 두 갈래로 흘러온 냇물은 화개천에 이르러 그 폭을 넓힌다. 화개천 오른쪽의 쌍계사 진입로에는 나도밤나무, 단풍나무, 전나무, 단백나무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쌍계사 경내에 들어서니 피안의 세계로 들어온 느낌이다. 쌍계사 뒤로 난 산길을 따라 허위허위 올라가면 지리산 10경의 하나이자 설악산 대승폭포와 함께 우리나라 2대 폭포로 꼽히는 불일폭포가 나타난다. 백학봉과 청학봉 사이의 계곡에서 떨어지는 하얀 물줄기의 울림이 깊고 우렁차다.
○드넓은 악양 들판과 최참판댁
다시 섬진강. 강변길을 따라 하동읍내 쪽으로 조금 가다 보면 평사리 공원이 나온다. 하얀 백사장과 푸른 강물이 파란 하늘과 어우러져 그림 같다. 각양각색의 표정으로 서 있는 장승들이 꽤나 해학적이다. 공원 앞 강변으로 나가 모래밭을 거닐거나 섬진강 물에 뛰어들어 멱을 감아도 좋겠다.
평사리 공원에서 악양 들판을 바라보며 조금 더 내려가면 최참판댁을 알리는 표지판이 보인다. 계단식으로 이어진, 80여만평의 들판은 얼핏 봐선 그리 커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마을 언덕배기에서 보니 입이 딱 벌어질 정도로 광활하다. 악양은 넓은 만큼 여러 마을을 품고 있는데, 지리산 품에 안긴 마을들은 하나같이 고향 동네처럼 정겹다.
◆시간이 멈춘 느린 강물…평사리 최참판댁 툇마루에 잠시, 나를 내려놓습니다
오랜 벗과 쉬엄쉬엄 걷는 2개 코스 31㎞ '토지길'
매실농원 장독의 넉넉함…청학동엔 책 읽는 소리
최참판댁은 평사리 마을 안쪽 고소산성 오르는 길 산 중턱에 있다. 지리산 줄기를 병풍처럼 두른 고소산성은 둘레 560m, 높이 4m의 견고한 석성으로 600년대 신라가 백제를 공격할 때 백제의 원군인 위병이 섬진강으로 들어오는 걸 막기 위해 나당연합군이 쌓았다고 한다. 최참판댁은 아쉽게도 예전처럼 고요하지 않다. 《토지》가 대하소설과 TV 드라마로 유명세를 타면서 사철 관광지로 탈바꿈한 결과다. 고만고만한 농가와 층층이 이어진 다랑이논밭 사이로 난 마을길도 새로 단장했다.
최참판댁은 안채와 사랑채, 별당채, 행랑채는 물론 초당과 사당까지 모두 14동의 한옥이 소설 속 분위기를 그대로 담아내고 있다. 최참판댁 안채와 토지마을에서 펼쳐지는 주말 상설 마당극도 볼 만하다. 소설의 줄거리를 다섯 마당으로 간추려 역동적으로 그려내는 마당극은 11월까지 공연한다. 최참판댁을 뒤로 하고 구불구불 이어진 들길과 돌담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니 최참판댁의 실제 모델로 알려진 조씨 고가가 나온다. 지리산 형제봉 아래에 고즈넉하게 자리한 이 집은 풍수지리에 어두운 사람도 금세 명당자리임을 알아챌 수 있다. 조선 개국공신 조준(1346~1405)의 직계손인 조한승 씨(89)가 집을 지키고 있는데 180년 전에 지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잘 보존돼 있다.
악양의 푸근한 정취에 좀 더 취해 보고 싶다면 ‘섬진강을 따라가는 박경리 토지길’로 알려진 슬로시티 토지길을 걸어보는 것도 좋겠다. 2개 코스 31㎞에 이르는 이 길은 빠름의 시대에 느림을 느껴보는 걷기여행 코스다. 땀을 흘리며 토지길을 걷다 보면 시원하게 흘러가는 악양천을 만나고 땡볕을 막아주는 숲그늘 신세도 지게 된다.
○경상도와 전라도가 만나는 곳
악양(평사리)에서 나와 광양으로 이어지는 섬진교에서 섬진강을 바라본다. 섬진교 아래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하동송림이 펼쳐져 있다. 300년생 소나무 800여 그루가 빽빽하게 숲을 이뤄 섬진강과 어우러진 모습은 언제 봐도 싱그럽다. 옛 시인들은 이 숲을 ‘백사청송(白沙靑松)’이라 부르며 아꼈다고 한다. 지금은 송림 안에 운동기구와 놀이시설도 설치돼 있어 가족 나들이 장소로 각광받지만 송림 서편은 자연휴식년제로 내년 2월까지 출입할 수 없다. 송림공원에서 배드민턴을 치는 사람들, 소나무 사이에 해먹을 걸고 쉬는 사람들 모두 여유롭다.
섬진교는 경남 하동과 전남 광양을 이어준다. 두 고장은 행정 주소는 다르지만 생활권은 하나다. 섬진교를 건너 오른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매실 명인 홍쌍리 여사(67)가 일군 19만8000㎡의 매실농원이 있다. 농원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섬진강과 매실마을 풍경이 참으로 절경이다. 도란도란 흘러가는 섬진강 물줄기 저쪽은 경남 하동 땅이다. 매실농원 중앙에는 매실장아찌를 담그기 위해 놓아둔 수천개의 옹기들이 장독대를 가득 메우고 있다. 농원 뒤편에는 대숲길이 있는데, 영화 ‘취화선’을 촬영한 곳이란다. 사방에서 바람에 서걱대는 댓잎소리가 들려온다. 그 소리가 싫지 않다.
○옛것의 아름다움을 찾아서
이제 하동 여행 마지막 코스인 지리산 청학동으로 들어간다. 횡천면 소재지를 거쳐 횡천강을 따라 청학동으로 가는 길은 섬진강길만큼이나 아름답다. 넉넉한 녹색 자연과 푸른 하동호가 내내 길동무가 돼준다. 청학동은 청암면 묵계리 삼신봉(1294m) 남쪽자락 해발 750m의 지리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수염 기른 훈장님의 가르침을 배울 수 있는 곳이다. 줄잡아 수십군데에 이르는 서당은 저마다 독특한 교육 방식으로 전국 각지에서 찾아온 초·중·고 학생들에게 예절, 한문, 무예, 판소리 등을 가르친다.
청학동이 유명한 것은 무엇보다 삼성궁(三聖宮)이 있기 때문이다. 삼성궁은 한민족의 뿌리인 환인·환웅·단군을 모신 곳이다. 도복을 입은 수행자의 엄숙한 안내에 따라 안으로 들어가면 신기한 세상이 펼쳐진다. 세 성인을 모신 건국전을 보고 국조전을 지나면 삼성궁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팔각 정자, 청학루에 이른다.
여유가 있다면 남해고속도로 진교 나들목에서 가까운 백련리 도요지 마을에 가보는 것도 좋겠다. 연꽃이 많아 백련리라 불리는 이 마을은 예로부터 대접, 접시, 사발, 항아리 등 전통 찻사발을 굽던 곳이다. 마을 앞에 펼쳐진 연꽃밭도 볼거리. 하늘을 향해 봉오리를 내민 청정한 연꽃들이 길손을 반긴다. 마을에 있는 하동요(055-882-4080), 새미골도요(055-722-7353)에서는 미리 예약하면 가마 불지피기, 도자기 빚기와 굽기 같은 체험 행사도 진행한다. 7월에는 전통 찻사발과 연꽃의 아름다움을 체험할 수 있는 축제도 열린다.
◆여행 팁 - 시원~한 재첩국·수박향 은어…갓 잡아올린 이 맛, 캬~
하동은 볼거리 못지않게 맛 또한 뒤지지 않는다. 하동의 맛은 거의가 섬진강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재첩, 참게, 은어 등이 그것들인데 요즘은 재첩잡이가 제철을 맞았다. 10월까지 계속되는 재첩잡이는 섬진강 어부들의 주요 생계 수단이다. 가슴까지 올라오는 장화를 신고 쇠갈퀴에 그물을 달아 만든 거랭이로 뻘과 모래 속에 들어 있는 재첩을 잡아낸다. 이렇게 잡은 재첩은 이물질을 걸러내고 끓는 물에 삶아 채소와 초장으로 회무침을 하거나 뽀얗게 우러난 국물에 부추와 파를 송송 썰어 넣어 재첩국을 만드는데 담백하고 시원한 맛이 일품이다.
수박향이 난다는 은어잡이도 한창이다. 은어는 날로 먹어도 아무런 탈이 없을 만큼 민물고기 가운데 가장 깨끗하다고 알려져 있다. 요즘 맛보는 은어회와 구이는 그야말로 진미(珍味)다. 초장에 찍어 입에 넣는 순간 은어회의 매력에 푹 빠진다.
섬진강에서는 봄엔 은어가, 가을에는 참게가 올라온다. 가을이 제철인 참게는 키토산이 많아 항균·항암 작용과 함께 단백질이 풍부해 비만, 고혈압, 간장병에 좋은 효과가 있다. 팔팔 끓인 물에 된장을 풀고 깨끗이 손질한 참게와 무, 호박, 토란줄기, 고사리를 넣고 끓인 참게탕은 잃어버린 입맛을 되돌려준다.
섬진강 주변에 하동의 별미인 재첩국(회), 참게탕, 은어구이(회) 등을 내놓는 식당들이 많다. 여여식당(055-884-0080) 부흥재첩식당(055-884-3903) 동흥재첩국(055-883-8333) 섬진강횟집(055-883-5527) 하동원조할매재첩식당(055-884-1034) 만천횟집(055-883-9580) 혜성식당(055-883-2140) 만지횟집(055-883-2020) 등이 성업 중이다.
잠잘 곳으로는 쌍계사 주변에 수류화개(055-882-7706) 섬진강펜션(055-884-8051) 들꽃산방펜션(055-882-2344) 쉬어가는 누각(055-884-0151) 동정산장(055-883-9886) 등이 있다. 불지산장(055-882-7071) 청옥산장(055-883-3695) 천지인(010-7765-1515) 등 청학동 숙박시설을 이용해도 된다. 토지마을에 있는 전통한옥체험관(055-882-6669)은 한옥의 정취에 젖어 하룻밤 보내기 좋은 곳이다. 청학동에 있는 몽양당(055-884-7066)은 학생들에게 예절교육을 가르치는 곳으로 유명하다.
서울남부터미널에서 하루 8차례 운행하는 버스를 타면 3시간50분 만에 하동에 도착한다. 하동이나 구례에서 쌍계사행 버스가 1시간마다 다니고, 청학동행 버스는 하동이나 진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타면 된다. 하동터미널(055-883-2662)
하동=김초록 여행작가
○마를 날이 없는 여름 섬진강
구례를 거쳐 섬진강을 따라 하동으로 들어간다. 길 양쪽으로 펼쳐진 산과 들이 참으로 넉넉해 보인다. 그 모습이 푸른 섬진강과 절묘한 대비를 이룬다. 한 폭의 멋진 산수화! 구례에서 하동까지 200리 길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다. 전북(진안) 전남(곡성·구례) 경남(하동)의 3도를 거치는 섬진강 500리 길은 그래서 누구나 한번쯤 가보고 싶은 곳이다. 섬진강은 긴 가뭄에도 마를 날이 없다. 강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꿈틀대는 생명의 소리가 들린다. 얼마나 많은 생명체들이 저 강을 안식처로 삼아왔을까?
그렇게 섬진강을 곁에 두고 달린 지 20여분. 상설시장으로 변한 화개장터를 둘러보고 쌍계사로 간다. 화개장터와 쌍계사를 잇는 길은 봄이면 벚꽃 터널로 변하지만 지금은 녹색 터널이다. 바람에 팔랑이는 나뭇잎들이 싱그럽기 그지없다. 젊은 연인들이 이 길을 함께 거닐며 결혼을 약속한다 해서 ‘혼례길’ 또는 ‘혼인길’이라 불린다던가.
호젓해서 좋은 쌍계사길 좌우로는 찻집들이 늘어서 있다. 화개천을 끼고 들어앉은 근사한 전통다실에 들어가면 아침 이슬을 먹고 자란 하동 야생차를 음미할 수 있다. 고요한 마음으로 마주앉아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다 보면 여행의 또 다른 재미를 발견하게 된다. 쌍계사는 차와 인연이 깊다. 절 입구에 차 시배지가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시배지 아래 차문화센터와 악양면사무소 앞 매암차문화박물관에서 녹차 제조 과정을 직접 보고 하동 차를 시음할 수 있다.
신흥마을에서 두 갈래로 흘러온 냇물은 화개천에 이르러 그 폭을 넓힌다. 화개천 오른쪽의 쌍계사 진입로에는 나도밤나무, 단풍나무, 전나무, 단백나무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쌍계사 경내에 들어서니 피안의 세계로 들어온 느낌이다. 쌍계사 뒤로 난 산길을 따라 허위허위 올라가면 지리산 10경의 하나이자 설악산 대승폭포와 함께 우리나라 2대 폭포로 꼽히는 불일폭포가 나타난다. 백학봉과 청학봉 사이의 계곡에서 떨어지는 하얀 물줄기의 울림이 깊고 우렁차다.
○드넓은 악양 들판과 최참판댁
다시 섬진강. 강변길을 따라 하동읍내 쪽으로 조금 가다 보면 평사리 공원이 나온다. 하얀 백사장과 푸른 강물이 파란 하늘과 어우러져 그림 같다. 각양각색의 표정으로 서 있는 장승들이 꽤나 해학적이다. 공원 앞 강변으로 나가 모래밭을 거닐거나 섬진강 물에 뛰어들어 멱을 감아도 좋겠다.
평사리 공원에서 악양 들판을 바라보며 조금 더 내려가면 최참판댁을 알리는 표지판이 보인다. 계단식으로 이어진, 80여만평의 들판은 얼핏 봐선 그리 커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마을 언덕배기에서 보니 입이 딱 벌어질 정도로 광활하다. 악양은 넓은 만큼 여러 마을을 품고 있는데, 지리산 품에 안긴 마을들은 하나같이 고향 동네처럼 정겹다.
◆시간이 멈춘 느린 강물…평사리 최참판댁 툇마루에 잠시, 나를 내려놓습니다
오랜 벗과 쉬엄쉬엄 걷는 2개 코스 31㎞ '토지길'
매실농원 장독의 넉넉함…청학동엔 책 읽는 소리
최참판댁은 평사리 마을 안쪽 고소산성 오르는 길 산 중턱에 있다. 지리산 줄기를 병풍처럼 두른 고소산성은 둘레 560m, 높이 4m의 견고한 석성으로 600년대 신라가 백제를 공격할 때 백제의 원군인 위병이 섬진강으로 들어오는 걸 막기 위해 나당연합군이 쌓았다고 한다. 최참판댁은 아쉽게도 예전처럼 고요하지 않다. 《토지》가 대하소설과 TV 드라마로 유명세를 타면서 사철 관광지로 탈바꿈한 결과다. 고만고만한 농가와 층층이 이어진 다랑이논밭 사이로 난 마을길도 새로 단장했다.
최참판댁은 안채와 사랑채, 별당채, 행랑채는 물론 초당과 사당까지 모두 14동의 한옥이 소설 속 분위기를 그대로 담아내고 있다. 최참판댁 안채와 토지마을에서 펼쳐지는 주말 상설 마당극도 볼 만하다. 소설의 줄거리를 다섯 마당으로 간추려 역동적으로 그려내는 마당극은 11월까지 공연한다. 최참판댁을 뒤로 하고 구불구불 이어진 들길과 돌담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니 최참판댁의 실제 모델로 알려진 조씨 고가가 나온다. 지리산 형제봉 아래에 고즈넉하게 자리한 이 집은 풍수지리에 어두운 사람도 금세 명당자리임을 알아챌 수 있다. 조선 개국공신 조준(1346~1405)의 직계손인 조한승 씨(89)가 집을 지키고 있는데 180년 전에 지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잘 보존돼 있다.
악양의 푸근한 정취에 좀 더 취해 보고 싶다면 ‘섬진강을 따라가는 박경리 토지길’로 알려진 슬로시티 토지길을 걸어보는 것도 좋겠다. 2개 코스 31㎞에 이르는 이 길은 빠름의 시대에 느림을 느껴보는 걷기여행 코스다. 땀을 흘리며 토지길을 걷다 보면 시원하게 흘러가는 악양천을 만나고 땡볕을 막아주는 숲그늘 신세도 지게 된다.
○경상도와 전라도가 만나는 곳
악양(평사리)에서 나와 광양으로 이어지는 섬진교에서 섬진강을 바라본다. 섬진교 아래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하동송림이 펼쳐져 있다. 300년생 소나무 800여 그루가 빽빽하게 숲을 이뤄 섬진강과 어우러진 모습은 언제 봐도 싱그럽다. 옛 시인들은 이 숲을 ‘백사청송(白沙靑松)’이라 부르며 아꼈다고 한다. 지금은 송림 안에 운동기구와 놀이시설도 설치돼 있어 가족 나들이 장소로 각광받지만 송림 서편은 자연휴식년제로 내년 2월까지 출입할 수 없다. 송림공원에서 배드민턴을 치는 사람들, 소나무 사이에 해먹을 걸고 쉬는 사람들 모두 여유롭다.
섬진교는 경남 하동과 전남 광양을 이어준다. 두 고장은 행정 주소는 다르지만 생활권은 하나다. 섬진교를 건너 오른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매실 명인 홍쌍리 여사(67)가 일군 19만8000㎡의 매실농원이 있다. 농원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섬진강과 매실마을 풍경이 참으로 절경이다. 도란도란 흘러가는 섬진강 물줄기 저쪽은 경남 하동 땅이다. 매실농원 중앙에는 매실장아찌를 담그기 위해 놓아둔 수천개의 옹기들이 장독대를 가득 메우고 있다. 농원 뒤편에는 대숲길이 있는데, 영화 ‘취화선’을 촬영한 곳이란다. 사방에서 바람에 서걱대는 댓잎소리가 들려온다. 그 소리가 싫지 않다.
○옛것의 아름다움을 찾아서
이제 하동 여행 마지막 코스인 지리산 청학동으로 들어간다. 횡천면 소재지를 거쳐 횡천강을 따라 청학동으로 가는 길은 섬진강길만큼이나 아름답다. 넉넉한 녹색 자연과 푸른 하동호가 내내 길동무가 돼준다. 청학동은 청암면 묵계리 삼신봉(1294m) 남쪽자락 해발 750m의 지리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수염 기른 훈장님의 가르침을 배울 수 있는 곳이다. 줄잡아 수십군데에 이르는 서당은 저마다 독특한 교육 방식으로 전국 각지에서 찾아온 초·중·고 학생들에게 예절, 한문, 무예, 판소리 등을 가르친다.
청학동이 유명한 것은 무엇보다 삼성궁(三聖宮)이 있기 때문이다. 삼성궁은 한민족의 뿌리인 환인·환웅·단군을 모신 곳이다. 도복을 입은 수행자의 엄숙한 안내에 따라 안으로 들어가면 신기한 세상이 펼쳐진다. 세 성인을 모신 건국전을 보고 국조전을 지나면 삼성궁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팔각 정자, 청학루에 이른다.
여유가 있다면 남해고속도로 진교 나들목에서 가까운 백련리 도요지 마을에 가보는 것도 좋겠다. 연꽃이 많아 백련리라 불리는 이 마을은 예로부터 대접, 접시, 사발, 항아리 등 전통 찻사발을 굽던 곳이다. 마을 앞에 펼쳐진 연꽃밭도 볼거리. 하늘을 향해 봉오리를 내민 청정한 연꽃들이 길손을 반긴다. 마을에 있는 하동요(055-882-4080), 새미골도요(055-722-7353)에서는 미리 예약하면 가마 불지피기, 도자기 빚기와 굽기 같은 체험 행사도 진행한다. 7월에는 전통 찻사발과 연꽃의 아름다움을 체험할 수 있는 축제도 열린다.
◆여행 팁 - 시원~한 재첩국·수박향 은어…갓 잡아올린 이 맛, 캬~
하동은 볼거리 못지않게 맛 또한 뒤지지 않는다. 하동의 맛은 거의가 섬진강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재첩, 참게, 은어 등이 그것들인데 요즘은 재첩잡이가 제철을 맞았다. 10월까지 계속되는 재첩잡이는 섬진강 어부들의 주요 생계 수단이다. 가슴까지 올라오는 장화를 신고 쇠갈퀴에 그물을 달아 만든 거랭이로 뻘과 모래 속에 들어 있는 재첩을 잡아낸다. 이렇게 잡은 재첩은 이물질을 걸러내고 끓는 물에 삶아 채소와 초장으로 회무침을 하거나 뽀얗게 우러난 국물에 부추와 파를 송송 썰어 넣어 재첩국을 만드는데 담백하고 시원한 맛이 일품이다.
수박향이 난다는 은어잡이도 한창이다. 은어는 날로 먹어도 아무런 탈이 없을 만큼 민물고기 가운데 가장 깨끗하다고 알려져 있다. 요즘 맛보는 은어회와 구이는 그야말로 진미(珍味)다. 초장에 찍어 입에 넣는 순간 은어회의 매력에 푹 빠진다.
섬진강에서는 봄엔 은어가, 가을에는 참게가 올라온다. 가을이 제철인 참게는 키토산이 많아 항균·항암 작용과 함께 단백질이 풍부해 비만, 고혈압, 간장병에 좋은 효과가 있다. 팔팔 끓인 물에 된장을 풀고 깨끗이 손질한 참게와 무, 호박, 토란줄기, 고사리를 넣고 끓인 참게탕은 잃어버린 입맛을 되돌려준다.
섬진강 주변에 하동의 별미인 재첩국(회), 참게탕, 은어구이(회) 등을 내놓는 식당들이 많다. 여여식당(055-884-0080) 부흥재첩식당(055-884-3903) 동흥재첩국(055-883-8333) 섬진강횟집(055-883-5527) 하동원조할매재첩식당(055-884-1034) 만천횟집(055-883-9580) 혜성식당(055-883-2140) 만지횟집(055-883-2020) 등이 성업 중이다.
잠잘 곳으로는 쌍계사 주변에 수류화개(055-882-7706) 섬진강펜션(055-884-8051) 들꽃산방펜션(055-882-2344) 쉬어가는 누각(055-884-0151) 동정산장(055-883-9886) 등이 있다. 불지산장(055-882-7071) 청옥산장(055-883-3695) 천지인(010-7765-1515) 등 청학동 숙박시설을 이용해도 된다. 토지마을에 있는 전통한옥체험관(055-882-6669)은 한옥의 정취에 젖어 하룻밤 보내기 좋은 곳이다. 청학동에 있는 몽양당(055-884-7066)은 학생들에게 예절교육을 가르치는 곳으로 유명하다.
서울남부터미널에서 하루 8차례 운행하는 버스를 타면 3시간50분 만에 하동에 도착한다. 하동이나 구례에서 쌍계사행 버스가 1시간마다 다니고, 청학동행 버스는 하동이나 진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타면 된다. 하동터미널(055-883-2662)
하동=김초록 여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