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내가 살아 있는 한 유로본드(유로존 공동 발행 국채)는 없을 것”이라는 강경 발언을 했다. 스페인과 이탈리아에 이어 프랑스 국채 금리까지 심상찮게 오르면서 ‘독일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 긴급대책을 내놓아야 한다’는 국내외 압력이 거세지자 정면 대결을 선택한 것이다. 27일(이하 현지시간) 프랑스·독일 정상회담과 28, 29일 유럽연합(EU) 정상회의를 앞두고 독일과 다른 유럽 국가들 간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결사 반대’ 천명한 메르켈

슈피겔과 디벨트 등 독일 언론들은 26일 “메르켈 총리가 집권우파연정 내 소수정당인 자유민주당(FDP) 행사에 참석해 ‘유로본드발행처럼 유로존(유로화 사용 17개국) 국가들이 채무 부담을 공동으로 지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못박았다”고 보도했다.

이날 행사에 참석했던 자민당 의원들은 메르켈 총리가 ‘내가 살아 있는 한(solange ich lebe)’이라는 이례적으로 강경한 표현을 썼다고 전했다. 자민당 의원들도 총리 발언에 잇따라 박수갈채를 보내고 “총리가 오래 살길 바란다”는 농담을 건넸다.


독일 총리실은 이날 발언에 대한 논평을 거부했다. 슈피겔은 “그동안 독일 정부가 ‘현재로선 적절한 대책이 아니다’는 식의 표현으로 유로본드에 반대해왔던 것을 감안하면 이번 총리의 발언 수위는 충격적”이라고 평가했다.

앞서 스페인과 이탈리아 등 재정위기국들은 “국채 금리(10년물)가 1년 이상 연 5%를 넘어서면서 정부의 자금조달 부담이 한계에 달했다”며 유로존이 공동으로 국채를 발행하는 유로본드 도입을 주문했다. 헤르만 반롬푀이 EU정상회의 상임의장과 조제 마누엘 바호주 EU집행위원장도 이날 발표한 ‘유럽개혁 10개년 청사진’ 보고서에서 “유로본드 발행을 위한 전 단계로 EU 각국의 재정과 예산을 관리·감독하는 EU재무청을 신설하자”며 유로본드 발행 방안에 힘을 실었다.

반면 독일은 유로본드를 발행하면 자금조달 금리가 현행(연 1.5% 수준)보다 높은 연 4.0% 안팎으로 크게 오른다며 도입에 난색을 표하고 있다. 독일이 추가로 부담해야 하는 비용이 연간 200억유로(독일 재무부 추산)~330억유로(Ifo경제연구소 추산)에 달한다는 계산도 나온다. 독일 경제일간 한델스블라트는 “지금까지 독일이 재정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구제금융 등에 투입한 돈만 3103억유로(약 448조원)에 이른다”며 위기 대응 비용 부담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먹구름 낀 EU 정상회의

메르켈 독일 총리가 초강경 태도를 보이면서 28, 29일 열리는 EU 정상회의 전망도 회의적으로 변해가고 있다. 마리오 몬티 이탈리아 총리는 26일 이탈리아 의회에 출석해 “이번 정상회의는 매우 힘들 것”이라며 “필요하다면 일요일 밤까지 작업해야 할 것”이라고 말해 회의 연장 가능성도 내비쳤다. 독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유로안정화기구(ESM) 자금으로 직접 유로존 국채를 매입하는 방안을 다시 논의하겠다는 각오도 내비쳤다.

메르켈 총리는 27일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 취임 이후 처음으로 프랑스 파리를 방문, 정상회담을 가졌지만 성장정책과 ESM의 유로존 국채 매입 등 주요 현안에 대한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주요 4개국 재무장관 회의도 큰 성과를 내지 못했다.

“정상회의를 하나 마나 차이가 없을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면서 유럽 주요국 증시가 하락하고 국채 금리는 올랐다. 이탈리아는 27일 90억유로 규모 6개월물 국채를 발행했는데 금리가 6개월만에 최고치(연2.96%)를 기록했다.

김동욱 기자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