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범 영산그룹 회장(55·사진)에게 1998년 오스트리아의 겨울은 혹독했다. 기아자동차 오스트리아 법인장이었던 그는 한국의 외환위기로 회사가 위기를 맞으면서 귀국과 퇴사, 선택의 기로에 섰다. “오스트리아에서 살길을 찾아야겠다”고 결심한 뒤 독일어에 능한 직원 1명을 구해 자본금 10만달러의 무역회사 ‘영산한델스’를 차렸다. 사탕 포장용지를 한국에서 수입해 유럽에 판매한 것을 시작으로 타이어 등 자동차 부품, 자동차 조립 개조 등으로 사업을 확대했다. 13년이 지난 지금 이 회사는 러시아 우크라이나 중국 등 15개국에 25개의 현지법인(직원 총 1000여명)을 두고 연매출 5000억여원을 올리는 중견 글로벌기업으로 성장했다. 한국과 유럽을 잇는 대표적인 한상(韓商)이 된 것이다.

지난 28일까지 사흘간 서울 쉐라톤워커힐호텔에서 열린 세계한인회장대회에 유럽한인회장 자격으로 참석한 박 회장을 행사장에서 만났다. 그는 작년 11월부터 유럽 27개국 한인회 회장을 대표하는 유럽한인총연합회장을 맡고 있다.

박 회장은 “오스트리아는 재정적자가 크지 않아 영향을 덜 받지만 체감경기는 나빠지고 있다”며 “많은 한인들이 식당 등 서비스업을 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반면 한국의 자동차는 가격경쟁력이 있어 타격이 크지 않다고 설명했다.

그는 “어려울 때일수록 ‘혁신’이 중요하다”고 했다. 박 회장은 1998년 외환위기 때는 러시아 우크라이나 등 동유럽 시장에 진출했고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때는 오스트리아은행과 손잡고 한국산 자동차 수입으로 승부수를 던졌다고 전했다. 그는 “유럽시장 상황이 어려워졌지만 아직 인원감축 등의 원가절감은 생각하지 않는다”며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것으로 타개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영산그룹은 최근 코트디부아르 말리 세네갈 등에 1500만달러 정도를 투입해 자동차 조립, 시멘트 포장지 사업을 시작했다. 박 회장은 “한·유럽연합(EU) 자유무역협정이 발효된 뒤 사업 기회가 넓어졌다”고 말했다.

영산그룹은 최근 ‘월드컬처네트워크’라는 문화공연기획사를 설립했다. 한국 문화예술을 유럽에 소개하고 한국 신진 예술가의 유럽 진출을 돕기 위해서다. 박 회장은 “전통과 예술에 자부심이 강한 유럽에서는 상품 수출만으로는 시장 확대에 한계가 있다”며 “한국 문화가 함께 소개돼야 제품에 대한 친밀감도 높아진다”고 설명했다.

박 회장은 2013년도 세계한인회장대회 공동의장을 맡았다. 그는 “한국인이란 정체성은 외국에서 경쟁력을 갖추는 데도 도움이 된다”며 “해외 한인들의 한국 국토대장정, 한글 백일장 참여 등을 적극 지원할 것”이라고 말했다.

조수영 기자 delinew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