셉테드 미리 했더라면…'오원춘 사건' 막을 수 있었는데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뉴스인사이드 - 경찰팀 리포트
'현대판 장승' 셉테드
후미진 골목서 흉악범죄 발생
건축 설계단계부터 범죄자 얼씬 못하게 환경 조성
국내 도입 현황은
2005년 판교 등서 부분 실시…뉴타운 지역 의무설치 지정
건설사서 인증 받으려 잰걸음
'현대판 장승' 셉테드
후미진 골목서 흉악범죄 발생
건축 설계단계부터 범죄자 얼씬 못하게 환경 조성
국내 도입 현황은
2005년 판교 등서 부분 실시…뉴타운 지역 의무설치 지정
건설사서 인증 받으려 잰걸음
서울 화곡3동 우장산근린공원 인근. 이곳에선 2014년 6월 입주를 앞두고 2600여가구의 아파트 건설공사가 한창이다. 겉으로는 서울 도처에 들어서는 신규 아파트와 별반 다를 게 없어보이지만 여기엔 입주자조차 모르는 ‘비밀’이 있다. 이곳은 서울에서 처음으로 아파트 설계 단계에 범죄를 사전에 막을 수 있도록 한 셉테드(범죄예방환경설계·CPTED·crime prevention through environmental design) 디자인 인증을 받았다. 범죄 예방을 위해 전문가들이 제시한 150여개 항목의 인증 과정을 거쳐 단지 설계가 이뤄진 것.
우선 이 단지의 모든 동 1~2층 가스배관엔 방범 커버가 씌워진다. 좀도둑이 가스배관을 타고 들어와 물건을 훔치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다. 지하주차장에서 지상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입구는 주민들의 눈에 잘 띄는 곳에 배치된다. 또 주민의 주차 위치정보를 알려주고 주민의 이동 동선에 따라 CCTV 모니터링을 한다. 택배기사로 위장한 강도의 범행 대상이 되지 않도록 우편·택배함은 아예 아파트 외벽에 설치한다. 비상벨이 설치된 주차장 벽면을 붉은 색으로 칠해 눈에 쉽게 띄도록 (아래 작은 사진 참조)하기도 했다.
대부분 한국셉테드학회 인증센터장인 이경훈 고려대 교수의 ‘작품’이다. 이처럼 아름다운 단지 내 조경과 넉넉한 평면 설계에 치중했던 아파트에 범죄예방학이 접목된 ‘범죄 제로’ 아파트가 속속 들어서고 있다.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부녀자가 납치되거나 가스배관을 타고 좀도둑이 안방을 넘나들지 않도록 설계 단계부터 셉테드 기법이 적용되는 단지가 늘어나고 있다.
2005년 국내에선 처음으로 경기 부천시가 일반주택단지를 셉테드 시범지역으로 지정한 데 이어 판교·광교신도시와 은평뉴타운 일부 단지에 셉테드기법이 도입됐다. 서울시도 2010년 조례를 만들어 새로 지정되는 모든 뉴타운에 셉테드기법을 도입하도록 권장하고 있다. 하지만 수요자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공급자인 지방자치단체와 건설업체들은 비용 부담을 이유로 소극적이어서 중앙정부 차원의 정책 추진이 시급한 실정이다.
◆셉테드 첫 적용 주택지 범죄율 20% 줄어
1960년대 미국에서 선보인 셉테드 기법은 1990년대 국내에 유입됐다. 도시·건축 설계 단계부터 범죄 예방 개념을 도입해 범죄자들이 얼씬도 못하게 만들자는 취지에서 만들어졌다. 첨단 기기를 동원한 거창한 개념이라기보단 설계 단계에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세심한 배려에 가깝다. 아파트 외곽에 따로 떨어져 외부인의 침입이 쉬웠던 놀이터를 단지 중앙에 배치하고, 지하주차장의 조명을 밝게 해 음침한 분위기를 없애는 것도 셉테드의 기본 기법이다. 주차장 곳곳에 비상벨을 설치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표창원 경찰대 교수는 “어떤 ‘사람’이 범죄를 저지르는 특정한 ‘기회’는 상당 부분 범행 지역의 공간적 특성과 관계가 있다”며 “김길태 조두순 등 흉악범들이 활개를 친 지역은 대부분 폐가와 후미진 골목이 많았다”고 지적했다.
셉테드기법이 도입된 곳의 범죄율이 떨어진다는 건 국내에서도 입증됐다. 2005년 국내에서 처음 셉테드 시범지역으로 지정된 부천시 고강동과 심곡동 등의 주택단지는 범죄 발생률이 줄어들었다. 첫 시범지역이라 CCTV나 밝은 조명을 설치하는 데 그쳤지만 범죄 발생률이 이전보다 20% 이상 줄었다. 범죄자들에게 보내는 주민들의 경고이자 ‘현대판 장승’인 셉테드기법의 효과가 입증된 셈이다. 판교·광교신도시에도 같은해 부분적으로 셉테드 기법이 적용됐다. 아직은 초보 단계로 볼 수 있지만 지하주차장에 차량 출입 차단기와 CCTV를 설치하고 10m 거리에서도 얼굴 식별이 가능하도록 조도를 밝게 유지하고 있다.
◆뉴타운, ‘범죄 제로’ 아파트 단지 설계
서울시가 나서면서 셉테드기법은 본격적으로 아파트단지에 적용되고 있다. 서울시는 2010년 1월 ‘뉴타운사업 시 셉테드를 의무화하겠다’며 조례를 개정했다.
개정된 조례는 △성북구 길음 △중랑구 봉화 △강북구 미아 △마포구 아현 △강서구 방화 등 2010년 1월 이후 구역이 지정된 15개 뉴타운에 적용됐다. 준공될 경우 설계 단계부터 셉테드 개념이 전면적으로 도입되는 첫 번째 사례가 될 것으로 보인다. 물론 시공업체가 경제성 등을 감안해 당초 서울시에 신고했던 대로 셉테드를 도입하지 않은 채 시공할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서울시의 조례에는 아직 셉테드를 적용하지 않을 경우 구체적으로 어떤 처벌을 받는다는 등의 강제 조항은 적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울시는 이 같은 취약점을 해당 구청의 사후 점검으로 보완할 예정이다. 해당 구청이 시공업체가 당초 서울시에 알린 대로 셉테드 요소를 잘 반영해 주거단지를 만들었는지 확인한 뒤 준공 확인을 하게 한다는 계획이다.
◆“국가표준인증제 도입해야”
전문가와 유관 부처 담당자들은 국내 셉테드가 아직 걸음마 단계라고 입을 모은다. 장옥철 경찰청 생활안전과 경위는 “셉테드는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하는 장기 투자 항목”이라며 “기존 노후 주택에도 적용해야 하는데 예산 문제로 쉽지 않아 CCTV 설치 정도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미국이나 영국처럼 정부 차원의 총체적인 관리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영국은 인증제도를 통해 방범 관련 제품, 주택 상가 등 건축물을 인증 대상으로 삼는다. 제조사나 건설사에서 인증을 신청하면 셉테드경찰관(ALO)이 3단계에 걸쳐 심사한 뒤 인증해 준다. 일본의 경우 도쿄의 대표적인 복합문화공간인 롯폰기힐스와 미드타운의 모든 건물 외관을 투명한 유리로 설계, 건물 내부에서 외부 침입자를 감시토록 하는 셉테드 기법을 적용했다.
미국은 지방정부 차원에서 조례로 셉테드를 명문화했다. 네덜란드는 경찰안전주택인증제도란 일종의 셉테드 표준을 제정해 인증마크를 부여한다. 국내에서는 아직 한국셉테드학회가 셉테드 디자인 인증을 하는 데 그치고 있다. 표 교수는 “국토해양부 행정안전부 지자체 등에 흩어진 업무를 통합할 주관 부서를 빨리 정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일종의 ‘권고 조항’일 뿐 제재 수단은 명문화해 놓지 않은 현행 법령을 재정비해야 하지만 성급하게 ‘채찍’만 휘두를 경우 자칫 역효과가 날 수 있다는 신중론도 있다. 이경훈 교수는 “셉테드를 적용하지 않을 경우 처벌하는 조항을 시급하게 만들 게 아니라 셉테드를 적용하면 인센티브를 주는 ‘당근’ 방식을 사용하면서 서서히 법령을 정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 셉테드
범죄예방환경설계(CPTED·crime prevention through environmental design). 도시 환경설계를 통해 범죄를 방지하는 선진국형 범죄 예방 기법. CCTV 위치설정, 조명 밝기 조절, 지하주차장 비상벨 설치 등이 대표적인 셉테드 기법이다.
김선주/하헌형 기자 saki@hankyung.com
우선 이 단지의 모든 동 1~2층 가스배관엔 방범 커버가 씌워진다. 좀도둑이 가스배관을 타고 들어와 물건을 훔치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다. 지하주차장에서 지상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입구는 주민들의 눈에 잘 띄는 곳에 배치된다. 또 주민의 주차 위치정보를 알려주고 주민의 이동 동선에 따라 CCTV 모니터링을 한다. 택배기사로 위장한 강도의 범행 대상이 되지 않도록 우편·택배함은 아예 아파트 외벽에 설치한다. 비상벨이 설치된 주차장 벽면을 붉은 색으로 칠해 눈에 쉽게 띄도록 (아래 작은 사진 참조)하기도 했다.
대부분 한국셉테드학회 인증센터장인 이경훈 고려대 교수의 ‘작품’이다. 이처럼 아름다운 단지 내 조경과 넉넉한 평면 설계에 치중했던 아파트에 범죄예방학이 접목된 ‘범죄 제로’ 아파트가 속속 들어서고 있다.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부녀자가 납치되거나 가스배관을 타고 좀도둑이 안방을 넘나들지 않도록 설계 단계부터 셉테드 기법이 적용되는 단지가 늘어나고 있다.
2005년 국내에선 처음으로 경기 부천시가 일반주택단지를 셉테드 시범지역으로 지정한 데 이어 판교·광교신도시와 은평뉴타운 일부 단지에 셉테드기법이 도입됐다. 서울시도 2010년 조례를 만들어 새로 지정되는 모든 뉴타운에 셉테드기법을 도입하도록 권장하고 있다. 하지만 수요자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공급자인 지방자치단체와 건설업체들은 비용 부담을 이유로 소극적이어서 중앙정부 차원의 정책 추진이 시급한 실정이다.
◆셉테드 첫 적용 주택지 범죄율 20% 줄어
1960년대 미국에서 선보인 셉테드 기법은 1990년대 국내에 유입됐다. 도시·건축 설계 단계부터 범죄 예방 개념을 도입해 범죄자들이 얼씬도 못하게 만들자는 취지에서 만들어졌다. 첨단 기기를 동원한 거창한 개념이라기보단 설계 단계에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세심한 배려에 가깝다. 아파트 외곽에 따로 떨어져 외부인의 침입이 쉬웠던 놀이터를 단지 중앙에 배치하고, 지하주차장의 조명을 밝게 해 음침한 분위기를 없애는 것도 셉테드의 기본 기법이다. 주차장 곳곳에 비상벨을 설치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표창원 경찰대 교수는 “어떤 ‘사람’이 범죄를 저지르는 특정한 ‘기회’는 상당 부분 범행 지역의 공간적 특성과 관계가 있다”며 “김길태 조두순 등 흉악범들이 활개를 친 지역은 대부분 폐가와 후미진 골목이 많았다”고 지적했다.
셉테드기법이 도입된 곳의 범죄율이 떨어진다는 건 국내에서도 입증됐다. 2005년 국내에서 처음 셉테드 시범지역으로 지정된 부천시 고강동과 심곡동 등의 주택단지는 범죄 발생률이 줄어들었다. 첫 시범지역이라 CCTV나 밝은 조명을 설치하는 데 그쳤지만 범죄 발생률이 이전보다 20% 이상 줄었다. 범죄자들에게 보내는 주민들의 경고이자 ‘현대판 장승’인 셉테드기법의 효과가 입증된 셈이다. 판교·광교신도시에도 같은해 부분적으로 셉테드 기법이 적용됐다. 아직은 초보 단계로 볼 수 있지만 지하주차장에 차량 출입 차단기와 CCTV를 설치하고 10m 거리에서도 얼굴 식별이 가능하도록 조도를 밝게 유지하고 있다.
◆뉴타운, ‘범죄 제로’ 아파트 단지 설계
서울시가 나서면서 셉테드기법은 본격적으로 아파트단지에 적용되고 있다. 서울시는 2010년 1월 ‘뉴타운사업 시 셉테드를 의무화하겠다’며 조례를 개정했다.
개정된 조례는 △성북구 길음 △중랑구 봉화 △강북구 미아 △마포구 아현 △강서구 방화 등 2010년 1월 이후 구역이 지정된 15개 뉴타운에 적용됐다. 준공될 경우 설계 단계부터 셉테드 개념이 전면적으로 도입되는 첫 번째 사례가 될 것으로 보인다. 물론 시공업체가 경제성 등을 감안해 당초 서울시에 신고했던 대로 셉테드를 도입하지 않은 채 시공할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서울시의 조례에는 아직 셉테드를 적용하지 않을 경우 구체적으로 어떤 처벌을 받는다는 등의 강제 조항은 적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울시는 이 같은 취약점을 해당 구청의 사후 점검으로 보완할 예정이다. 해당 구청이 시공업체가 당초 서울시에 알린 대로 셉테드 요소를 잘 반영해 주거단지를 만들었는지 확인한 뒤 준공 확인을 하게 한다는 계획이다.
◆“국가표준인증제 도입해야”
전문가와 유관 부처 담당자들은 국내 셉테드가 아직 걸음마 단계라고 입을 모은다. 장옥철 경찰청 생활안전과 경위는 “셉테드는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하는 장기 투자 항목”이라며 “기존 노후 주택에도 적용해야 하는데 예산 문제로 쉽지 않아 CCTV 설치 정도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미국이나 영국처럼 정부 차원의 총체적인 관리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영국은 인증제도를 통해 방범 관련 제품, 주택 상가 등 건축물을 인증 대상으로 삼는다. 제조사나 건설사에서 인증을 신청하면 셉테드경찰관(ALO)이 3단계에 걸쳐 심사한 뒤 인증해 준다. 일본의 경우 도쿄의 대표적인 복합문화공간인 롯폰기힐스와 미드타운의 모든 건물 외관을 투명한 유리로 설계, 건물 내부에서 외부 침입자를 감시토록 하는 셉테드 기법을 적용했다.
미국은 지방정부 차원에서 조례로 셉테드를 명문화했다. 네덜란드는 경찰안전주택인증제도란 일종의 셉테드 표준을 제정해 인증마크를 부여한다. 국내에서는 아직 한국셉테드학회가 셉테드 디자인 인증을 하는 데 그치고 있다. 표 교수는 “국토해양부 행정안전부 지자체 등에 흩어진 업무를 통합할 주관 부서를 빨리 정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일종의 ‘권고 조항’일 뿐 제재 수단은 명문화해 놓지 않은 현행 법령을 재정비해야 하지만 성급하게 ‘채찍’만 휘두를 경우 자칫 역효과가 날 수 있다는 신중론도 있다. 이경훈 교수는 “셉테드를 적용하지 않을 경우 처벌하는 조항을 시급하게 만들 게 아니라 셉테드를 적용하면 인센티브를 주는 ‘당근’ 방식을 사용하면서 서서히 법령을 정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 셉테드
범죄예방환경설계(CPTED·crime prevention through environmental design). 도시 환경설계를 통해 범죄를 방지하는 선진국형 범죄 예방 기법. CCTV 위치설정, 조명 밝기 조절, 지하주차장 비상벨 설치 등이 대표적인 셉테드 기법이다.
김선주/하헌형 기자 sak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