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들어 우리 경제의 ‘혈액’인 돈이 다시 안 돈다는 말이 자주 들린다. 이 때문에 실제 발생 여부와 관계없이 각종 위기론이 고개를 들고 있고, 투자자를 비롯한 경제주체들의 의욕은 급격히 위축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시중자금의 부동화 정도를 보여주는 지표인 요구불예금, 머니마켓펀드(MMF), 자산관리계좌(CMA) 등과 같은 초단기 금융상품에 돈이 몰리고 있다. 또 시중에서 퇴장하는 자금(hoarding money)도 빠르게 늘어나는 추세다. 투자자들도 안전자산을 선호하는 경향이 갈수록 뚜렷하다.

한 나라 경제에서 돈이 돌지 않으면 사람의 몸처럼 심장에서 멀리 떨어진 손발부터 썩어가는 증상이 나타난다. 당초 기대와 달리 현 정부 들어 있는 계층, 대기업보다 서민층과 자영업자, 지방기업, 중소기업일수록 어려움을 호소하다 못해 쓰러지는 현상이 그것이다.

이론적으로 특정 국가에서 돈이 얼마나 잘 도는가를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지표는 통화승수와 통화유통속도다. 통화유통속도란 일정 기간 한 단위의 통화가 거래를 위해 사용된 횟수를 말한다. 통화유통속도가 떨어진다는 것은 돈이 잘 유통되지 않아 그 나라 경제가 활력을 잃고 있음을 시사한다.

한 나라의 돈 흐름이 얼마나 정체돼 있는가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지표가 통화승수다. 통화승수는 돈의 총량을 의미하는 통화량을 중앙은행이 공급하는 본원 통화(고성능 화폐·high-powered money)로 나눈 수치다. 통화승수는 그 나라 국민의 현금보유 성향과 예금은행의 지급준비율 등에 의해 결정된다. 요즘처럼 기준금리가 변경되지 않을 때는 현금보유 성향과 지급준비율이 작을수록 통화승수는 커진다.

한국은행이 집계하는 우리 경제의 ‘활력지표’는 리먼브러더스 사태 이후 위기론이 거세게 불었던 2009년 3월보다 더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당시 22.39배였던 통화승수가 지난 4월 22.04배까지 하락했다. 통화유통속도도 올 1분기 0.7206으로 1년 전(0.7269)보다 둔화됐다. 그만큼 국민의 현금보유 성향이 강해져 시중에서 돈이 퇴장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요즘처럼 통화승수와 통화유통속도가 떨어지면 중앙은행이 아무리 돈을 공급한다 해도 민간부문 반응이 시원찮아 각종 경제정책의 효율성이 떨어진다. 또한 금융시장에선 종전의 경제 이론으로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 이상(異狀)현상이 속출한다. 이른바 ‘경제학의 혼돈시대(chaos of economics)’로 더 심해질 경우 좀비 경제에 대한 우려가 높아진다.

한 나라 경제에 돈이 안 돌면 자연스럽게 위기론이 고개를 들게 마련이다. 요즘 거론되는 위기론은 크게 보면 세 가지다. 하나는 우리 국민이 미래에 먹고살 ‘성장대안’ 부재론이다. 거듭된 위기로 국내 기업들의 설비투자가 제대로 안돼 우리 경제의 기초체력에 해당하는 잠재성장률이 해가 지날수록 떨어지는 현상을 말한다.

또 다른 하나는 미국 일본 등 선진국은 견제하고 중국 브라질 등 후발국은 턱밑까지 추격하고 있다는 ‘샌드위치 위기론’이다. 최근에는 경제활력이 떨어지면서 증시를 중심으로 ‘역(逆)핀볼 효과형 위기론’도 제기되고 있다.

핀볼 효과란 제임스 버크의 유명한 책 이름으로, 사소한 사건이나 물건 하나가 도미노처럼 연결되고 점점 증폭되면서 세상을 움직일 수 있는 역사적 사건을 만들어내는 현상을 뜻한다. 이 용어를 증시에 적용한다면 각각의 볼링핀에 해당하는 주가결정요인인 경제성장과 유동성, 기업실적, 투자자 심리 등이 우호적으로 예상돼 주가가 오를 수 있다는 얘기다.

‘역핀볼 효과’란 ‘핀볼 효과’의 정반대 상황이다. 경제활력이 떨어짐에 따라 시중에 풀린 돈과 실물경제가 겉도는 가운데 갈수록 성장률과 기업실적이 떨어진다. 이 때문에 투자자들의 심리가 위축되면서 주식거래량도 급격히 감소한다. 최근 우리 경제와 증시 상황을 보면 이런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위기론이 부는 배경이다.

증시는 한 나라 경제의 실상을 반영하는 얼굴이다. 돈이 안 돌고 위기론이 고개를 들면 증시에 좋을리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동화된 시중자금의 물꼬는 증시에서 터진다. 한 가지 희망을 걸어볼 수 있는 것은 이번 유럽연합(EU) 정상회의에서 당초 예상과 달리 비교적 큰 성과를 거둠에 따라 막혀가던 물꼬가 터질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다.

하지만 유럽위기가 재정통합 등과 같은 근본적 문제에 대한 EU 회원국 간 의견 접근이 없을 때에는 한국 증시에 부는 위기론이 쉽게 누그러지기 힘들 것으로 예상된다. 설령 이번 EU 정상회의 성과를 바탕으로 주가가 올라간다 해도 요즘처럼 돈이 안 돌고 위기론이 나돌 때는 상하 변동폭이 크고 기업 또는 업종 간 차별화 현상은 심하게 나타난다.

따라서 올 하반기 이후 주가가 본격적으로 상승하기 위해서는 우리 경제에 돈이 돌아 생기를 되찾고 위기론이 불식돼야 한다. 우리가 통제하는 데 한계가 있는 유럽 위기와 같은 대외변수는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최근 상황이 정부와 정책수용층 간 신뢰 위기에 기인하는 측면도 있음을 감안하면, 가능한 한 이른 시일 내 신뢰를 회복하는 일이 시급한 과제다.

한상춘 객원논설위원 sch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