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재 칼럼] 경제민주화? 주자학의 부활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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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인들에 대한 지식계급의 공세…비열한 도덕의 함정을 파는 그들
정규재 논설실장 jkj@hankyung.com
정규재 논설실장 jkj@hankyung.com
경제민주화는 사농공상의 봉건질서로 돌아가자는 낡은 주장의 재등장이다. 장사꾼들이 큰 돈 벌어 거들먹거리는 꼴을 눈 뜨고 못 보겠다는 것이 소위 재벌 개혁론의 숨은 동기다. 지식분자들의 광범위한 암묵적 동의가 깔려 있다. 무슨 새로운 시대정신 같은 것이 아니다. 물론 거들먹거리는 재벌가도 없지 않을 테다. 그러나 기껏해야 TV드라마다. 타인의 사생활에 대한 합리적 무관심이 근대적 에티켓의 기본이다. 그러나 남의 집 숟가락이 몇 개인지를 한국인은 여전히 궁금해한다. 엽전들의 DNA다. 촌락사회요 눈치사회다. 지금까지 자본주의 간판을 걸어왔던 것이 이상할 정도다.
‘학교 다닐 때 공부도 못한 친구들이 돈 좀 벌었다고…’라면서 침을 튀긴다면 그는 서울대 법대를 나왔거나 그 비슷한 먹물이다. 국회의원 판검사 교수 관료들이다. 겉으로는 탐욕의 시장 경제를 걱정하느라 얼굴이 어둡지만 속에서는 오래 된 지배-피지배의 틀을 재연하려는 본능이 꿈틀거린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장사꾼들이 대접받지 못하는 나라는 결국엔 비참해진다. 사치조차 오히려 장려할 일이라던 박제가(朴薺家)가 울고갈 일이요, 쌀 가격 통제에 격노했던 박지원(朴趾源)이 통곡할 일이다. 근대화 60년에 상업을 짓밟을 명분 찾기에 다시 혈안이 되고만 봉건 주자학적 인간들이 펼치는 반란이 바로 경제민주화 투쟁이다. ‘깨끗하게 돈 벌면 누가 뭐라고 하냐?’는 비아냥과 어깃장이 이들의 주특기다. 어느 시대건 깨끗하게 돈 버는 일은 불가능하다. 주자학적 계급관은 그 뿌리가 너무도 깊어서 박정희조차 온전히 걷어내지 못했다. 그래서 포스트 박정희 시기였던 80년대초에도 관료와 교수집단의 재벌 해체론이 극성이었었다. 그때도 경제력 집중이 주된 논거였다는 웃기는 이야기.
1원1표의 자본주의 의사결정 구조를 1인1표의 소위 민주적 의사결정 제도로 돌리자는 것이 주장의 골자다. 좋은 말로 기업 경영에 민주적 통제를 가하자는 주장이다. 말이 민주적 통제이지 실은 경제할 자유의 박탈이며 상인계급에 대한 도덕군자의 우위를 확고히 하자는 것이다. 재벌총수가 1%의 주식으로 기업 경영권을 독점하는 현상을 비판하는 것이 논쟁의 핵심이다. 맞는 주장처럼 보이지만 아니다. 의결권 괴리가 없는 나라는 어디에도 없다. 워런버핏이 갖고 있는 클래스A 주식의 의결권은 무려 1만개다. 대부분 미국 기업이 수십배(구글) 수천배(시스코시스템즈) 심지어 버핏처럼 1만개의 차등의결권을 갖고 있다. 이건희 회장의 의결권은 달랑 1개다. 누구의 지배력이 과하다는 것인가.
대주주와 소액주주가 같다고 주장하면 경제민주화 진영이다. 그러나 절대로 같을 수 없다. 소액주주는 주식을 매매하면서 창업자의 가치에 편승할 뿐이다. 재벌처럼 소유 경영자라면 더욱 그렇다. 중국집조차 주인이 있을 때와 없을 때의 가게 분위기가 다른 법이다. 거기에 소유 경영의 탁월성이 있다. 그것을 해체하고 자신들의 지배영역 안으로 집어넣자는 것이 재벌개혁론이요 경제민주화론이다. 복지를 늘려달라는 따위의 시시한 요구가 아니다.
주자학은 세계를 정적 질서로 보는 철학이다. 마이클 샌델도 그렇다. 중소기업과의 공정성이나 형평성 문제도 그렇고 기업의 사업영역을 규모에 따라 세분해 영업권역을 지정하려는 시도는 정태적 질서관의 논리적 결과다. 이들의 눈에는 시장에서 일어나는 창조적 파괴(유통혁신)나 동태적 변동(새로운 사업의 등장) 따위는 아예 들어오지 않는다. 지금 존재하는 먹거리를 적절하게 나누면서 평화롭게 먹고살자는 농촌공동체적 도덕관이다.
절대로 지킬 수 없는 법을 만들어 놓고 민중을 겁박하는 것이 주자학의 주특기다. 제사상 문제부터 상례절차와 복식에 이르기까지 그 복잡다단한 규제의 그물망을 생각해보라. 현대 한국에서는 상속세제 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세계에서 가장 높고 징벌적이며 가진 자에 대한 증오감을 최대한 은폐해놓고 있는 것이 무려 65%의 높은 상속세다. 이 세금을 다 내고나면 상속은 불가능하다. 결국 일감몰아주기 등 온갖 편법을 시도하게 되고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불법을 낚아채면서 도덕적 비난의 화살을 퍼붓는 것이 지식계급이 만든 주자학적 덫이다. 조선이 망한 이유를 우리는 이제사 알아가는 중이다.
정규재 논설실장 jkj@hankyung.com
‘학교 다닐 때 공부도 못한 친구들이 돈 좀 벌었다고…’라면서 침을 튀긴다면 그는 서울대 법대를 나왔거나 그 비슷한 먹물이다. 국회의원 판검사 교수 관료들이다. 겉으로는 탐욕의 시장 경제를 걱정하느라 얼굴이 어둡지만 속에서는 오래 된 지배-피지배의 틀을 재연하려는 본능이 꿈틀거린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장사꾼들이 대접받지 못하는 나라는 결국엔 비참해진다. 사치조차 오히려 장려할 일이라던 박제가(朴薺家)가 울고갈 일이요, 쌀 가격 통제에 격노했던 박지원(朴趾源)이 통곡할 일이다. 근대화 60년에 상업을 짓밟을 명분 찾기에 다시 혈안이 되고만 봉건 주자학적 인간들이 펼치는 반란이 바로 경제민주화 투쟁이다. ‘깨끗하게 돈 벌면 누가 뭐라고 하냐?’는 비아냥과 어깃장이 이들의 주특기다. 어느 시대건 깨끗하게 돈 버는 일은 불가능하다. 주자학적 계급관은 그 뿌리가 너무도 깊어서 박정희조차 온전히 걷어내지 못했다. 그래서 포스트 박정희 시기였던 80년대초에도 관료와 교수집단의 재벌 해체론이 극성이었었다. 그때도 경제력 집중이 주된 논거였다는 웃기는 이야기.
1원1표의 자본주의 의사결정 구조를 1인1표의 소위 민주적 의사결정 제도로 돌리자는 것이 주장의 골자다. 좋은 말로 기업 경영에 민주적 통제를 가하자는 주장이다. 말이 민주적 통제이지 실은 경제할 자유의 박탈이며 상인계급에 대한 도덕군자의 우위를 확고히 하자는 것이다. 재벌총수가 1%의 주식으로 기업 경영권을 독점하는 현상을 비판하는 것이 논쟁의 핵심이다. 맞는 주장처럼 보이지만 아니다. 의결권 괴리가 없는 나라는 어디에도 없다. 워런버핏이 갖고 있는 클래스A 주식의 의결권은 무려 1만개다. 대부분 미국 기업이 수십배(구글) 수천배(시스코시스템즈) 심지어 버핏처럼 1만개의 차등의결권을 갖고 있다. 이건희 회장의 의결권은 달랑 1개다. 누구의 지배력이 과하다는 것인가.
대주주와 소액주주가 같다고 주장하면 경제민주화 진영이다. 그러나 절대로 같을 수 없다. 소액주주는 주식을 매매하면서 창업자의 가치에 편승할 뿐이다. 재벌처럼 소유 경영자라면 더욱 그렇다. 중국집조차 주인이 있을 때와 없을 때의 가게 분위기가 다른 법이다. 거기에 소유 경영의 탁월성이 있다. 그것을 해체하고 자신들의 지배영역 안으로 집어넣자는 것이 재벌개혁론이요 경제민주화론이다. 복지를 늘려달라는 따위의 시시한 요구가 아니다.
주자학은 세계를 정적 질서로 보는 철학이다. 마이클 샌델도 그렇다. 중소기업과의 공정성이나 형평성 문제도 그렇고 기업의 사업영역을 규모에 따라 세분해 영업권역을 지정하려는 시도는 정태적 질서관의 논리적 결과다. 이들의 눈에는 시장에서 일어나는 창조적 파괴(유통혁신)나 동태적 변동(새로운 사업의 등장) 따위는 아예 들어오지 않는다. 지금 존재하는 먹거리를 적절하게 나누면서 평화롭게 먹고살자는 농촌공동체적 도덕관이다.
절대로 지킬 수 없는 법을 만들어 놓고 민중을 겁박하는 것이 주자학의 주특기다. 제사상 문제부터 상례절차와 복식에 이르기까지 그 복잡다단한 규제의 그물망을 생각해보라. 현대 한국에서는 상속세제 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세계에서 가장 높고 징벌적이며 가진 자에 대한 증오감을 최대한 은폐해놓고 있는 것이 무려 65%의 높은 상속세다. 이 세금을 다 내고나면 상속은 불가능하다. 결국 일감몰아주기 등 온갖 편법을 시도하게 되고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불법을 낚아채면서 도덕적 비난의 화살을 퍼붓는 것이 지식계급이 만든 주자학적 덫이다. 조선이 망한 이유를 우리는 이제사 알아가는 중이다.
정규재 논설실장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