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 한파가 몰아치던 1997년 12월. 재계 순위(자산 기준) 12위의 한라그룹이 생사의 기로에 섰다. 만도기계(현 만도), 한라중공업(현 현대삼호중공업), 한라건설, 한라펄프제지(현 미국 보워터펄프제지) 등 핵심 계열사의 부도로 그룹이 해체될 위기에 처했다.

당시 계열사 중 유일하게 부도나지 않은 곳이 자동차용 에어컨·히터 등을 생산하는 한라공조였다. 미국 포드자동차와 만도기계가 50 대 50으로 합작, 1986년 3월 설립한 한라공조는 그룹 계열사 간 상호지급보증에서 빠져 있었다.

구조조정이 시급했던 한라는 1999년 당시 포드 계열사였던 비스티온에 한라공조 지분(50%)을 팔았다. 2008년 금융위기로 포드가 경영난에 빠지자 한라공조의 대주주 비스티온은 사모펀드들의 손에 넘어갔다.

한라공조 지분 70%를 가진 비스티온이 기관과 개인투자자가 들고 있는 주식 30%를 공개매수(주당 2만8500원)해 상장폐지를 추진하면서 한라공조의 운명에 다시 관심이 쏠리고 있다.

◆공개매수 성공할까

한라공조 공개매수의 성공 여부는 2대 주주인 국민연금의 선택에 달렸다. 비스티온이 확보하려는 한라공조 지분은 상장폐지 요건인 95% 이상이다. 참여 물량이 2670만2000주(25.01%)를 넘지 않으면 공개매수는 성사되지 않는다. 1047만4000주(9.81%)를 보유 중인 국민연금이 공개매수에 응하지 않으면 비스티온은 지분 95%를 확보할 수 없다.

국민연금 관계자는 “공개매수 참여 여부에 대해 아직 결정하지 않았다”며 “투자수익률과 국내 경제에 미치는 영향 등을 다각적인 측면에서 검토해 판단할 것”이라고 말했다. 국민연금은 2009년 한라공조 지분 5.05%를 주당 8457원에 사들였고 2010년과 지난해 1만~2만원대에 추가 매입, 평균 취득 단가가 1만원 초반대를 넘지 않을 것으로 추정된다.

증권가에선 공개매수 성공 여부에 대한 전망이 엇갈린다. KB투자증권은 한라공조의 주식 적정가치를 3만2400~4만97000원 사이로 분석하고 국민연금의 참여 가능성이 높지 않다고 내다봤다. 반면 NH농협증권은 비스티온이 제시한 주당 2만8500원은 적정가격이라고 평가했다. 이날 한라공조 주가는 11.62% 오른 2만7850원에 마감했다.

◆현대·기아차의 선택은

비스티온 지분은 헤지펀드와 증권사 등 기관투자가가 49.45%를 갖고 있다. 비스티온이 한라공조 지분을 장기간 보유하기보다는 차익실현 뒤 매각에 나설 것이라는 예상이 설득력을 얻는 이유다.

자동차 및 증권업계에서는 한라공조를 인수할 후보로 현대·기아차를 꼽는다. 한라공조 매출의 대부분이 현대·기아차에서 나오는 만큼 다른 자동차업체들이 섣불리 덤벼들기 힘들 것이라는 논리다. 현대·기아차 계열사 중 에어컨과 히터 등 공조시스템을 생산하는 곳은 없다.

시장에선 한라그룹도 잠재적인 인수 후보로 꼽는다. 한라그룹 측은 “인수의지는 있지만 구체적으로 검토한 바가 없다”고 밝혔다.

현대·기아차가 한라공조 인수금액을 떨어뜨리기 위해 물량을 점차 줄일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이상현 NH농협증권 애널리스트는 “한라공조가 상장폐지되면 현대·기아차도 정보를 얻는 데 제한받게 된다”며 “한라공조에 이어 국내시장 2위인 두원공조를 대항마로 키울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한라공조의 이익잉여금이 1조2000억원에 이른다”며 “비스티온의 대주주인 사모펀드들이 고배당과 매각을 노리고 상장폐지에 나섰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조철 한국산업연구원 주력산업팀장은 “만도기계가 외국 기업에 팔렸을 때 현대차가 브레이크시스템 등 주요부품 주문을 다른 업체로 돌린 적이 있다”며 “이번에도 한라공조 쪽 비중을 줄일 가능성이 높다”고 예상했다.

이건호 기자 leek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