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 오전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비공개로 진행된 전국경제인연합회 글로벌경영협의회는 무거운 분위기였다. 자동차, 철강, 조선, 건설, 중공업 등 국내 주력 산업분야에서 일하고 있는 해외 사업담당 임원들은 글로벌 경제위기 여파로 흔들리고 있는 시장 상황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지금은 말그대로 ‘비상경영 상황’이라고 입을 모았다. 경제민주화 논란에 빠져있는 정치권을 성토하는 거친 발언들도 회의장 밖까지 터져 나왔다. “위기감이 확산되지 않고 있다” “조그만 희망이라도 달라”는 원망 섞인 목소리도 들렸다.

유럽 경제위기의 직격탄을 맞고 있는 조선, 철강업계는 더 이상 버티기 어렵다며 우려의 목소리를 높였다. 조선업계에서 시작된 불황이 도미노 현상처럼 다른 산업으로 번질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도 나왔다. 철강업계 관계자는 “올해 완공하는 중국 광둥성 강판 공장 등 조선업계 활황 때 투자했던 설비들이 앞으로 공급 과잉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고 걱정했다. 이 관계자는 “올해는 어떻게든 버티겠지만 내년부터 조선, 중공업이 살아나지 않으면 공급 과잉에 직면하게 된다”며 “이들 산업에 대한 정책금융을 통해 유럽시장에 나갈 수 있는 물꼬를 터주지 않으면 철강, 조선 전체가 흔들릴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 중공업업체 임원은 “예전엔 금융권에서 대출받을 때 20%의 상환 담보로 80%까지 프로젝트 파이낸싱이 가능했는데 유럽 금융시장이 경색되면서 50%까지 채무보증을 요구해 어려움이 많다”고 토로했다. 그는 “이라크에서 수주한 900㎿ 규모의 대규모 플랜트의 경우 국내 금융회사들이 기피해 외국계 은행과 거래할 수밖에 없었다”며 “수출입은행, 무역보험공사 등이 리스크를 회피하려고 하지 말고 기업을 지원하는 정책적 차원에서 재정적 뒷받침을 해줄 필요가 있다”고 호소했다.

전선업계 관계자는 “살기 위해 유동성 확보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데 현금을 많이 갖고 있으면 지탄을 받는 분위기”라며 “성장동력도 필요하지만 지금 같은 시기에는 무엇보다 안정성을 봐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를 예견했던 ‘닥터둠’ 누리엘 루비니 미국 뉴욕대 교수의 인터뷰가 화제가 되기도 했다. 루비니 교수는 지난 17일 내년 세계경제에 ‘퍼펙트 스톰’이 닥칠 것이라고 경고했다. 한 대기업 임원은 “퍼펙트 스톰설에 공감한다”며 “신흥시장의 저성장, 중국의 경착륙, 미국 대선 이후 이란과의 갈등, 고유가 등이 겹쳐 내년은 기업에 최악의 상황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승철 전경련 전무는 “지난 45년간 우리나라가 세계경제와 별도로 성장가도를 달렸다면 최근 5년간은 세계 성장률과 똑같이 움직이는 완전 동조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며 “국내 기업도 유럽발 경제위기에서 비켜가긴 어려울 것”이라고 예상했다. 한 유통업체 임원은 국내 시장도 급속하게 얼어붙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10년 내 백화점 판매량이 이 정도로 떨어진 적은 처음”이라며 “작년 10월부터 실적이 꺾여 매출 증가 목표치를 두 자릿수에서 한 자릿수로 바꿨고, 명품 고가제품 비중이 줄어 방문객당 단가도 떨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날 해외사업 담당 임원들은 정부 차원에서 금융, 세제 지원대책을 마련해달라고 주문했다. 항공회사 임원은 “기업별로 컨틴전시 플랜을 세우고 있지만 정부 차원에서 지원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또 다른 대기업 임원은 “관료들은 정권 말기에 세종시 이전문제로 딴 생각만 하고 있는 느낌이고 정치권에선 경제민주화 얘기만 나온다”며 “경제살리기 특별위원회나 정부 차원의 대책을 마련해야 할 때”라고 덧붙였다.

전예진 기자 ac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