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고교 동창 녀석을 만났다. “9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고 하는 녀석의 어깨는 유난히 처져보였다. 그는 나이 마흔이 다되도록 이렇다 할 직업을 가져본 적이 없다. 평범한 지방대를 나와 취업을 할 즈음에 외환위기가 터졌고 이후 ‘괜찮은’ 일자리 근처에는 얼씬도 못했다.

대선을 5개월가량 앞둔 요즘, 정치권의 최대 화두는 경제민주화와 복지다. 여야를 가릴 것 없이 이번 대선을 관통하는 이른바 ‘시대정신’이다. 하지만 정치권이 간과하고 있는 게 바로 일자리나 성장 같은 얘기다.

사라진 3000개의 일자리

특히 경제민주화는 일자리 측면에서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실제 정치권이 영세 상인을 보호하기 위해 도입한 대형마트 규제(월 2회 강제 휴무, 밤 12시 이후 영업 제한)로 대형마트 3사의 근무 인원이 3000명가량 줄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주말 아르바이트생, 주차 단속요원 같은 일자리가 주로 사라졌다고 한다. 중소기업과 영세 상인을 보호하겠다는 취지의 정책이 또 다른 취약계층의 일자리를 앗아간 셈이다.

고용과 복지 재원의 원천인 기업들도 언제까지 지금의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가 지금 잘나간다고 앞으로도 계속 쌩쌩 달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한번만 삐끗하면 세계시장에서 도태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일본 소니와 핀란드 노키아의 사례로 알 수 있다. 조선 해운 건설 등은 이미 수년째 불황이다.

복지도 한 편만 봐선 곤란하다. 우리나라는 선진국에 비해 경제규모 대비 복지비 비중이 낮고 사회 안전망이 부족해 복지를 더 늘려야 하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재정 건전성을 고려하지 않고 무작정 복지를 늘렸다가는 재정위기를 겪는 그리스나 스페인 꼴이 날 수도 있다. 그 피해는 결국 중산층과 서민들이 가장 먼저 받을 수밖에 없다.

잊혀져가는 성장과 경쟁력

우리나라 고용시장은 겉으로는 양호해보이지만 속으론 곪고 있다. 통계청 고용동향을 보면 지난달 총 취업자 수는 2511만7000명으로 1년 전보다 36만5000명 늘어 비교적 양호했다. 하지만 한창 일할 나이인 20대(-3만4000명) 30대(-7만명) 40대(-4만명)는 모조리 일자리가 줄고 50대(24만6000명)와 60대 이상(22만2000명)이 일자리 증가를 주도했다. 그나마 50대 이상 일자리의 상당수는 영세 자영업이거나 일용직이다. 내수 경기가 침체에 빠지면서 이들은 이미 고통구간에 진입해 있는 상태다.

요즘은 경제민주화와 복지를 얘기하지 않으면 ‘꼴통’처럼 느껴지지만 따지고 보면 이걸 뒷받침하는 것은 성장과 일자리, 국가 경쟁력, 혁신 같은 ‘고리타분한’ 단어들이다. 하지만 바로 여기에 국가미래 전략의 핵심이 있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유명한 대선 슬로건에 빗대자면 여전히 ‘문제는 일자리야, 바보야’를 붙잡고 있어야 한다.

박근혜 전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이나 문재인 민주통합당 상임고문 등 여야의 유력 대선주자들에게선 이 같은 고민과 비전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구호만으로 일자리가 만들어질 수 있다면 남유럽 국가들의 재정위기도 없었을 것이다. 대선 주자들은 누가 일자리를 만들고 누구 돈으로 복지정책을 펼쳐야 할지 곰곰이 생각해봐야 한다. 이번 대선에선 여야 모두 화려한 구호나 선명성 경쟁이 아닌 묵직한 일자리 대책으로 진검 승부를 펼쳤으면 좋겠다. 고교 친구 녀석이 빨리 일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말이다.

주용석 경제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