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말~1970년대 초 미국의 대학은 급팽창했다. 베이비 붐 세대의 대학 진학이 러시를 이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학생들의 피부 색깔에 따라 일부 과목 성적이 크게 갈렸다. UC버클리의 미적분입문 과목에서 흑인과 라틴계 학생의 60%가 D~F학점을 받았다. 1973~75년의 흑인 학생 미적분 평균 성적은 D+였다. 고급 수학 과목을 수강 신청한 흑인 학생은 한 명도 없었다. 대부분이 미적분에서 낙제했기 때문이다. 반면 백인 학생과 중국계 학생들은 좋은 성적을 유지했다. 어떻게 된 일일까.

1970년대 UC버클리에서 수학과 박사 과정을 밟던 유이 트레이스먼은 이런 학력 차이의 원인을 찾아냈다. 중국계 학생들은 흑인, 라틴계 학생들과 달리 밤에 모여 함께 공부했다는 것. 중국계 학생들은 그룹스터디를 통해 수학을 생각하고 질문하며 효율적으로 배웠다는 것이다. 일명 ‘또래압력 효과’가 긍정적으로 작용했다는 설명이다.

티나 로젠버그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는 《또래압력은 어떻게 세상을 치유하는가》를 통해 “또래압력은 전 세계적 사회문제를 해결할 열쇠”라고 역설한다. 집단의 구조 속에 깊숙이 배어 있는 사회문제를 해결하려면 긍정적 또래압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래압력은 또래(동료)집단의 사회적 압력을 말한다. 또래집단 안에서는 서로 눈높이를 맞추려는 노력을 한다. 집단에서 쫓겨날 경우의 소외감과 스트레스를 피하기 위해서다. 그동안 또래압력은 흡연 음주 도박 등 사회적 역기능 면에서 조명돼왔다. 서로 나쁜 행동을 따라할 뿐이란 것이었다.

저자가 들려주는 ‘사회적 치유책’으로서의 또래압력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롭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또래압력에 주목, 10대 청소년의 에이즈 감염률을 크게 끌어내렸다. 에이즈 예방 캠페인 ‘러브라이프’가 10대의 소속욕구에 초점을 맞추면서부터다. 저자는 “러브라인 캠페인은 대물림된 가난으로 무기력하고 외로운 10대에게 긍정적 소속감을 보증하는 문화 플랫폼이 됐다”고 설명했다.

‘발칸의 도살자’라 불리는 세르비아 독재자 밀로셰비치를 실각시킨 민주화운동 오트포르(저항이란 뜻의 세르비아어)도 또래압력의 순기능 덕을 본 사례다. 오트포르는 여느 민주화운동과 달리 국민이 느끼는 공포, 숙명론, 수동성을 없애 누구나 하나라는 동질감을 불어넣었다. 최신 유행의 표어와 삽화, 대중음악을 동원하고 따분한 연설 대신 정권을 조롱하는 유머와 거리공연을 활용해 ‘민주화운동이 아닌 라이프 스타일’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유전적인 특징과 또래압력은 인간의 정체성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인”이라며 “사회적 치유책은 공동체적 존재이고, 다른 사람이 인정하기를 바라는 인간 본성에 집중해 또래압력의 순기능을 활용하는 데서 그 성패가 갈린다”고 강조한다.

김재일 기자 kjil@hankyung.com